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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mang Dec 09. 2021

빚지며 살아온 이야기(김초엽, 「지구 끝의 온실」)

서로를 키워내는 힘



뭐든 제대로 키워버리는 여자를 안다. 남편이 집을 나가버린 후 자식들을 크게 키웠고, 소작농으로 남의 논밭을 지으며 풍성하게 일궈냈으며 자식이 맡겨놓은 손주 넷을 건강하게 키웠다. 가물고 마르고 피폐한 것들이 그 여자 앞으로 자꾸만 기어 왔다. 그것들이 다가오면 부러 자리를 펴주고 예쁘게 눕혀주었다. 그러고는 두툼한 손으로 묵묵히 땅을 파내어 가꾸고 밥을 지어 먹였다. 비쩍 말랐던 것들은 곧 늘어지게 누웠다. 그것들이 제 배를 손으로 통통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게 하는 여자. 나는 나의 할머니를 안다.      


김초엽의 ‘지구 끝의 온실’을 읽는 내내 나는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목숨을 걸고 씨앗을 뿌려 밭을 일구고 약을 지어 타인을 기꺼이 살려내고야 마는 이들의 이야기가 내가 아는 여자와 닮아있었다. 미래를 이야기하는 SF 소설을 따라 곧게 걷다가도 자꾸만 고개를 돌렸다. 소설 속 아영처럼 “고개를 숙여 바닥에 귀를 댔다.”(385쪽) 손으로 흙을 만져보고 쓰다듬으며 다시 읽어 내려간다.     


‘지구 끝의 온실’은 자가증식 독성 먼지 ‘더스트’로 인해 지구 종말이 가까워진 상황을 첫 배경으로 한다. 김초엽은 ‘지구 끝’이라는 표현을 통해 연속된 면을 가진 지구의 물성에 한계를 부여한다. ‘끝’이라는 텍스트가 지닌 단호함은 인간들에게 주어진 공간과 시간의 한계를 강조한다. 종말을 앞둔 지구가 가진 유한성을 통과하며 이야기는 점차 확장된다. 지구 ‘끝’에 서 있는 이들에게 유일하게 꺼지지 않는 빛을 가진 온실은 희망을 상징한다. 그들이 지닌 다양한 질감을 동시에 내보일 수 없는 인간과 달리 그들의 희망인 온실은 모든 면을 투명하고 밝게 내보인다.      


소설의 전체적인 이야기는 3개의 큰 관계로 구성된다. 더스트를 피해 ‘프림 빌리지’로 찾아간 나오미-아마라 자매. 재건 이후의 이야기를 끌어가며 ‘모스바나’의 역사를 바로잡는 아영과 어릴 적 이웃집 할머니 이희수. ‘프림 빌리지’를 만들고 더스트 증식 속도를 제한할 모스바나의 발명과 확산의 주인공 레이첼과 지수. 이야기는 상대적으로 젊고 약한 모습으로 묘사되는 나오미-아마라-아영의 이야기를 바탕색으로 한다. 그 위에 어린 아영과 이희수의 만남을 덧칠하고 나오미 아마라가 겪는 타인과의 우정을 더 한다. 이야기들의 교차점을 쌓아갈수록 강한 면이 주로 부각되었던 지수와 레이첼에게 드러나지 않았던 의존, 그리움, 화, 애정 등이 드러나며 점차 인물들 모두에게 입체적인 모습이 부여된다. 독자는 겹겹이 쌓아 올려진 인물들의 숨겨진 면에 공감하여 ‘지구 끝의 온실’이 결국 서로에게 빚지며 살아온 이야기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지수와 레이첼의 관계가 후반에 충분히 설명되며 온실이 갖는 의미에 이해를 돕는다. 소설 초반부터 투명하게 모든 면을 내보이는 온실과 같이 후반으로 갈수록 납작했던 존재들이 비로소 온실처럼 빛난다.     


각자 흩어지게 된 이후 프림 빌리지의 사람들은 그들이 약속했던 식물의 씨앗을 뿌린다. 심고 가꾸는 행위를 의심하지 않고 묵묵히 모스바나를 키워낸다. 이들은 60년이 지나서야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되고 그들이 해냈던 일을 목격한다. 그들 덕분에 재건된 지구를 만끽하게 된 후손 아영은 그들에게 진 빚을 뿌리를 찾는 일로나마 갚으려 한다.      


‘지구 끝의 온실’을 읽고 그만 마음이 급해지고 만다. 나의 할머니가 요즘 부쩍 눈물을 자주 보이기 때문이다. 본가에 다녀올 때마다 언제 또 보겠냐며 울먹인다. 나를 키워낸 할머니의 크고 억센 모습이 익숙했던 나는 그녀의 약해진 모습에 괜히 화가 난다. 그녀의 눈물을 보지 못하고 등을 돌린다. 그런 소리 말라며 허공에 대고 손을 흔든다. 할머니 뒷면에 숨겨졌던 약한 질감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프림 빌리지 할머니들의 진짜 이야기가 60년 만에 푸른빛을 되찾았듯이, 이 이야기는 내 발밑에 자리 잡은 뿌리를 보게 했다. “제거되지 않은 푸른빛”(327쪽)을 닮은 한 겹의 마음을 가진 나의 할머니. 그녀가 보상을 바라지 않고 기꺼이 길러낸 나의 뿌리를 만져본다. 뭐든지 잘 키워내는 여자에게 진 빚을 잊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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