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마망리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amang Mar 03. 2022

할머니와 양말

최승자,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 49쪽. 내 어머니는 영원한 마침표를 찍었으며, 조만간에 그녀가 살았던 한 문장 전체가 차례차례 지워져나갈 것이다. 그 길고 긴, 그러나 너무도 너무도 짧고, 지루하고 지겹고 고달프고 안간힘 써야 했던 한 문장이, 쓰일 때보다 몇억 배 빠른 속도로 지워져 마침내 텅 빈 백지만 남으리라. 그 뒤엔 이윽고 그 백지마저 없어져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그녀가 살았던 문장의 문장 없는 마침표 하나, 지구상의 외로운 표적 하나, 그녀의 무덤 하나만이 남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를 묘사하거나 설명하는 그 어떠한 동사도 이제는 모두 과거형을 취하리라.(최승자 산문,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오늘의 이야기

시인에게 상실이란 스스로의 질감을 깨닫게 해준 사건이었다. 그녀는 어머니를 잃고 발아래 튼튼한 기반을 비로소 느낀다. 자신조차 알지 못했던 뿌리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후두두 흙을 흘리며 떠다녔다는 것을 깨닫는다. 행복의 가능성을 믿지 못했던 그는 이제 두 발로 섰고 자리를 잡았다. 세상에 나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나는 늘 늦다. 타인의 상실을 마주하고서야 생각을 길러낸다. 조금이라도 더 미뤄두고 싶은 나의 사건을 미루지 않고 바라보게 한다. 최승자 시인의 산문을 단숨에 읽어내지 못한 이유이다. 자주 멈췄고 많이 울었다.

나의 할머니는 우리 4남매의 속옷과 내복, 양말을 계절이 바뀔 때마다 살뜰히 챙겼다. 그럼 우리 넷은 구멍이 날 때까지 뛰어놀거나 내복 무릎과 팔꿈치가 닳아질 때까지 집을 뒹굴어 다녔다. 우리는 때맞춰 딱 그만큼씩 자랐다.

취향이랄 것이 없었던 우리는 할머니가 알아서 사다 준 것들을 불평 없이 닳도록 입었다. 우리가 모두 성인이 되어 오백 원이면 마음에 드는 캐릭터 양말을 학교 앞에서, 시내에서 살 수 있게 되었는데도. 할머니는 늘 우리의 양말을 걱정했다.
"할머니 나 이거 안 신어." 발목을 덮고도 남을 만큼 긴 시장 양말을 내미는 할머니에게 나는 자주 이렇게 말했다. 할머니는 선택받지 못한 양말을 다시 집어넣었다. 할머니가 양말을 골라 주지 않아도, 속옷을 사주지 않아도 되는 짧지 않은 시간을 그렇게 보냈다.

“양말 바닥이 많이 닳아브렀어야.” 며칠 전, 할머니가 내 발을 보며 말했다. 본가에 내려갔을 때였다. 할머니는 등허리가 아파서 내내 괴로워했는데. 그 와중에 내 검은 양말에서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이거 신어라잉." 발목에 파란 꽃이 자수로 새겨있고 바닥에는 미끄럼 방지 고무가 고양이 발바닥처럼 프린트되어 있는 양말이다. "한 개는 느그 고모 오믄 줄랑께. 이거는 니가 가꼬가." 나는 내 취향이 아니라며 지랄하지 않았다. 나는 "응. 잘 신을게. 할머니. 양말 이쁘다." 하고 양말을 받아들었다.

양말은 반으로 곱게 접혀 양말 걸이에 걸려있었다. 투명 포장지에 예쁘게 쌓인 얌전한 양말이었다.

서울로 올라와서 가방은 열었다. 양말을 꺼냈다. 이 양말은 정말 못 신겠구나. 생각했다. 할머니가 나에게 준 이 양말을 신어버리면 닳아져 버릴 것 같고. 우리의 시간도 닳아질 것 같고. 내 기억도 닳아질 것 같고. 그렇게 없어져 버릴 것 같고. 새 양말을 사다 줄 사람은 없는데 양말은 계속 사라질 것만 같고. 그랬더니 막 눈물만 나왔다.

매거진의 이전글 무장 슬프고 제때 오는 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