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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mang Feb 27. 2022

무장 슬프고 제때 오는 시

장석주 시선집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장석주 시선집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이 시선집은 1979년부터 2019년까지 시인이 펴낸 시집 가운데 절판된 아홉 권의 책에서 가려 뽑은 시로 엮었다.”(알려두기 中)

장석주 시선집,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는 이렇게 시작한다. “어쩌다 시를 쓰게 됐을까?”

내가 시인이 될 운명이라 믿고 지내던 몇 날이 있었다. 일상의 모든 일이 낯설고 새삼스러웠다. 벅찬 해가 떴다가 무장 슬프게 지는 날도 있었다. 그냥 그런 날들이 “우연의 일이고 신기한 사건”처럼 나에게 왔다. 실감 나지 않은 일은 나를 스치듯 지나갔고. 그 뒤 잘 읽지 못하던 날들이 계속되었다.

시인이 말한 “눈꺼풀만큼 가벼운 우울로 빚은 시”를 몇 달에 걸쳐 곱씹다가는 바위만큼 무거운 우울로 가득 찬 이제야 내뱉게 되었다. 하도 오래 씹어 단물이 빠진 글자들이 이제야 마구 달려온다.

시를 짓는다는 것과 시를 먹는다는 것은. 아마 “달의 엉덩이가 구릉에 걸리”는 일. 내주는 자리에 엉덩이 온기 꾹 눌러놓고 가는 것, 넘겨받은 자리의 온기를 느끼며 기꺼이 앉는 일. 어제의 나는 “함부로 몸을 버려 오늘의 물속에 휘어져 숨”었고 오늘의 나는 “후회하고 후회하고 후회”하며 내일의 나는 다시 “허리를 곧추세울 것” 이다. 아프고 적확한 시의 배치는 나의 입을 벌려 시를 먹게했다. 나는 순서대로 성실하게 씹었던 것이다. 그렇게 단물 빠진 글자들을 만나게 된 것이고 나는 또 읽는다.

시 없이 살아온 날보다 시와 살아진 날이 긴 시인은 말한다. “나는 문장노동자다, 라고 뻥을 쳤으나 / 두루마리 휴지 기백 기천 개나 쓰고 / 떠날 자들에 속할 따름이다 / 구두 밑창 몇 개도 닳아없앨 예정이다.” “노동으로 등이 휜 적이 없”는 절박한 문장노동의 증거를 4부에 남긴 단상으로 증명한다. 애써 알아봐 주어라 한 일 없지만 깊이 살피지 않아도 알게 되는 것이 있다. “어둠 속에서 울부짖는 고라니의 울음 따위를 숙성시켜” 시로 빚어내는 시인의 둥그런 등을 본다. 시를 시인 줄 모르고 만지던 열다섯 소년의 등이 맞닿는다. 그들은 이제 막 서로를 기대어 앉는다. “그건 우연의 일이고 신기한 사건”이다.

시는 제때 온다.

• (대추 한 알)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 저 안에 태풍 몇 개 / 저 안에 천둥 몇 개 / 저 안에 벼락 몇 개 //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 저 안에 초승달 몇 날(111쪽)

• 어쩌다 시를 쓰게 됐을까?(4쪽)
• 시가 내 차가운 이마를 콕 찍어 호명했다고 말하지는 못한다. 어느 날 내 안에 시의 싹이 조그맣게 돋아났으니 그건 우연의 일이고 신기한 사건이었다.(4쪽)
• 눈꺼풀만큼 가벼운 우울로 빚은 시를 골라 엮은 시집 한 권을 펴낸다.(5쪽)
• (그리운 나라) 달의 엉덩이가 구릉에 걸리고(13쪽)
• (나의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하여) 어제의 물은 함부로 몸을 버려 오늘의 물속에 휘어져 숨고(17쪽)
• (태안 저녁바다) 과거가 된 시간은 결코 돌아갈 수 없다(79쪽)
• (물오리 일가) 나는 문장노동자다, 라고 뻥을 쳤으나 / 두루마리 휴지 기백 기천 개나 쓰고 / 떠날 자들에 속할 따름이다. / 구두 밑창 몇 개도 닳아없앨 예정이다.(108쪽)
• 138. 어둠 속의 울부짖는 고라니의 울음 따위를 숙성시켜 질박한 몇 줄의 언어를 얻겠다.(1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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