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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mang Feb 18. 2022

당연한 평화는 없다고

 여자를 위한 나라는 없다(샤틴 아크타르, 출판사 : 아시아)


지난 연말과 연초를 고스란히 이 책에 바쳤다. 전쟁을 그야말로 온몸으로 통과한 여성들의 이야기는 시간을 지나 다시 나를 뚫고 지나갔다. 이 책을 읽는 동안 가벼운 마음으로 매일 썼던 리뷰도 쓰지 못했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다>가 여러 목소리를 담은 전투에 참여한 여성들의 이야기라면. 이 책은 전쟁을 온몸으로 겪었지만 전투에는 참여하지 않은, 타락한 여성으로 취급받던 성노예 '비랑가나'의 이야기다.


(*비랑가나 :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에서 파키스탄 군에 의해 성노예로 학대당한 방글라데시 여성들에게 전후 방글라데시 국가에서 부여한 '여성 영웅'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


이 책은 마리암이라는 한 여성이 큰 줄기가 되어 그녀의 옷깃을 스친 여성들이 살거나 죽게 된 서사를 다룬다. 그 과정은 소년과 함께 영화관에서 손을 잡았다는 이유로 고향에서 쫓겨나듯 떠나온 어린 마리암을 시작으로 대학 시절 임신 후 버려진 마리암을 통과한다. 이어 전쟁 속으로 끌려다닌 마리암과 여성들이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 살아내고 싶었던 마음이 복잡하게 얽힌다.


이 책이 더 현실적으로 다가왔던 이유는 딸을 향한 엄마를 포함한 가족, 친척들이 지닌 양가적인 감정이 세심하게 묘사되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여성이 있을까. 나는 생각했다. 가부장적이고 보수적인 틀에서 한 세월 이상을 견뎌왔을 우리나라의 여성 어른들과 "그렇게 힘들었으면 왜 자살하지 않았지?"라는 말로 괴로움을 끊임없이 저울질당하던 책 속의 인물들이 겹쳐진다. 위안부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고 나에게 너무 먼 일이라고 생각했음에 죄책감이 더 크게 남는다.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한다. 한 사람의 인생을 읽지 않고 함부로 말하지 않기로 한다.


159쪽. 과거의 날들이 소맷부리에 매달려 그들을 잡아당긴다. 시험공부를 하고 암기하는 지루하고 피곤하게 공부하던 일상. 아니면, 연애편지를 쓰다가 들켜 무척 당황했던 날들. 조원들 모두에게 기만과 거부의 경험이 있다. 때때로 사는 것이 너무나 힘들어 자살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전쟁 앞에서 이 모든 낡은 슬픔은 증발하고 만다. 단조로운 과거는 다채로운 색깔로 넘치고 꿈처럼 침범할 수 없는 영역이 된다.


298쪽. 베비는 묵티에게 말한다. “나한테도 일어날 수 있었던 일이었어요. 내 동생이나 어머니에게도 있을 수 있는 일이었어요. 다만 운이 좋아서 면한 거죠.”


547쪽. 사공이 없는 보트는 아누라다를 향해 미끄러지듯 나아간다. 마리암이 허공에서 자신을 향해 내밀어진 얼음처럼 차가운 아누라다의 손을 잡자, 그녀가 보트의 갑판으로 올라선다.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놓지 않는다. 오, 얼마만인가! 오랜 세월을 물속에서 부유하던 아누라다의 피부는 이끼와 물풀로 덮여 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손은 둘 다 따뜻하다. 아누라나도 다시 전처럼 쾌활한 처녀가 된다. 마리암의 눈에는 물론 자신이 보이지 않는다. 마리암의 앞에는 투키 베굼이 있는데 블라우스나 속치마 없이 사리만 입고 있다. 그녀가 포로가 되었던 그해로 되돌아가 다시 초두리 가의 하녀가 되었다. 그녀는 입고 있던 사리의 끝을 공처럼 말아 얼굴 앞에 들고 있다. 해가 세상에서 지고 있다. 붉은 수평선을 배경으로 머리카락처럼 떠 있는 땅, 남겨두고 온 그 땅이 투키의 눈동자에 비친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아누라다는 희열에 차서 말한다. “참 아름다운 나라야, 우리나라!” 투키는 얼굴을 가렸던 사리의 끝을 내리며 말한다. “우리의 피로 지킨 나라.”


* 책을 제공받았으나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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