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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mang Mar 04. 2022

어느 날 시로 나오겠지

최승자, 어떤 나무들은

- 5쪽. 아마도 이 책으로 큰 도움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다름아닌 나 자신일 것이다. 내가 몹시도 지치고 피곤해질 때, 작으나마 내가 새로 배운 것들을 포기하고 싶어질 때, 이 일기에 나오는, 필경은 아마도 내 눈에만 보일, 꿈틀거리며 새로 태어나려 애쓰는 내 자신의 모습이 내게 힘을 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최승자, 어떤 나무들은)

 오늘의 이야기

시인이 “밥 먹고 잤”던 이야기, 읽고 쓴 이야기, 친구를 만나고 헤어지는 이야기를 들어 좋다. 시인과 나는 분명 같은 말을 쓰고 있는데도 막힘없이 얘기 나누는 것은 어려웠다. 시인의 시는 두렵고 슬프고 어둡고 무서웠고 아팠다. 시인의 일기를 들여다보니 내 바닥에 가라앉아있던 부유물이 확 일어나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희망이 없어 보이던 일기 속 승자는 창의적인 요리를 하고, 뜻밖에 패션왕이 되기도 하며, 라면으로 향수병을 달래고 친구와의 예정된 이별에 며칠 앞서 마음 아파하기도 한다.

사실 나는 여행 에세이류에 질색한다. 낯선 장소를 좋아하지 않는 데다가 여행을 떠나도 오랜 기간 푹 눌러앉아 그곳 냄새에 익숙해진 후에야 안정을 찾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인의 일기가 더 반가웠다. 푹 한곳에 엉덩이를 붙이고 진득하게 살아내는 것 같았으며. 고국에서보다 더 유연하고 편하게 살아지는 시인의 시간을 뒷짐지고 편하게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시인은 아이오와에서의 시간을 이렇게 말한다. “방에 틀어박혀 누워서 공상인지 망상인지 온갖 것들을 생각하는 시간이 내게는 제일 편안하고 또 제일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이기도 하다” 한곳에 눌러앉아 무료한 하루를 반복해서 살아가는 시인의 일기가 소중하게 읽히는 이유이다.

시인을 시로만 만났던 이들은. 이 책안의 승자를 반드시 만나야 한다. 그래야 당신의 시가 완성된다. “착실하게 내부로 가라앉”았을 그것들은 “어느 날 시로 나오겠지.”

- 99쪽. 승자에 대해서는 “승자는 행복을 두려워한다”라고 쓰여 있었다는 게 기억날 뿐이다.
- 101쪽. 당신은 매우 ‘powerful’한 시인이다. 당신의 번역 중 얼마간은 뛰어난 것이 못 되지만, 당신 자신의 독특한 목소리들이 그것을 뚫고 내비쳐 보인다. 어떤 고통이 당신 가슴속에서 계속되어야만 하는 것일까. 우리가 함께 막힘없이 얘기를 나눌 수 있도록 내가 당신네 나라 말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당신 목소리의 그 가차없는 강렬함에 경탄을 보낸다. - 마틴 로퍼
- 172쪽. 그냥 아름답다고 말할 수밖에는, 이상하게도 나는 아이오와에서 단 한 편의 시도, 아니 단 한 줄의 시구도 얻지 못했다. 모든 게 너무 다르기 때문에 내 감수성이 문 꽉 닫아버리고 있는 걸까. 그렇긴 하지만 안타깝지는 않다. 내가 체험하는 것들 모두가 착실하게 내 내부로 가라앉고 있을 거다. 그리고 어느 날 시로 나오겠지.
- 243쪽. 그런데 맨 앞줄에 앉아 있던 한 늙은 노신사는 계속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 시가 너무 절망적이어서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낭독이 끝나고 질문 받는 시간이 되었을 때 바로 그 양반이 내게 “Do you have a hope?”라고 물었기 때문이다. 내 대답인즉슨 절망이란 전도된 희망이다, 당신이 희망을 갖고 있지 않다면 당신은 절망할 수 없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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