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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mang May 10. 2022

사랑하는 나의 늙은 여자, 할머니 인터뷰

나의 복덕


영원히 살 것 같던 늙은 여자를 안다. 그녀는 혜원을 포함한 손주 넷을 먹이고 길러 사회로 흘려보냈다. 셋째 손녀딸 혜원은 이 여자가 ‘우리의 할머니’인 모습 그대로 더 늙지도, 더 젊어지지도 않고 영원히 곁에 남아 숨을 쉬고 있을 거라 믿었다. 때문에 그녀를 잃을까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그녀가 밥알을 씹어 삼키기 어려워지며 혜원의 마음이 급해졌다. 복덕이 못한 말을 가득 안고 떠날까 두려웠던 그때. 꺼지던 복덕의 숨이 다시 살아났다. 복덕이 준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     


“할머니 그냥 편하게 이야기해주면 돼.”라고 인터뷰를 요청한 혜원의 말에 복덕은 “나는 암것도 몰라.” 하고 손을 내저었다. 그러다가 마치 말할 준비가 된 사람처럼 지난 시간을 내뱉었다. 혜원은 복덕과 함께 웃다가 울다가 뻥튀기를 먹다가 물을 마시며 이야기를 듣고 기억했다. 복덕은 1929년, 곡성군 태문리라는 곳에서 2남 2녀 중 셋째 딸로 태어났다. 막내 여동생은 어릴 적 죽고, 나중에는 오빠 둘만 남았다. 동네에서는 꽃 피는 봄이면 꽃놀이하러 갔는데. 장구를 칠 줄 아는 사람이 없어 복덕이 장구 치는 역할을 도맡았다. 복덕은 “뭣을 얼매나 칠 줄 안다고. 그냥 모르고 하는 거제.” 하면서도 “그래도 잘 친다고들 했제. 그때는 장구 칠 줄 아는 사람도 나뿐이었어야.” 하며 뽐을 냈다. 복덕은 나이 열일곱에 결혼했다. 중매하는 사람이 복덕을 “나이는 어린디 손이 야물어서 뭐든 잘할 거”라며 소개했다. 당시 양가 아버지들은 결혼시키길 원했는데, 복덕의 엄마가 혼자 혼인을 반대하고 나섰다. 시어머니가 될 사람이 성질이 괄괄하고 동네에서 유명한 싸움꾼이라 마음에 걸린 탓이다. "우리 어매는 그런 것을 싫어허거등" 복덕은 엄마를 그렇게 회상했다. 주변 설득에 못 이겨 혼인이 이뤄졌고, 복덕은 무서운 시어머니 밑에서 고된 시집살이를 했다.     


복덕은 목화밭 두 마지기(약 400평)를 가꾸고 수확했다. 길쌈(실을 내어 옷감을 짜는 일), 빨래, 밥짓기 등 온갖 일을 했다. “길쌈을 내가 얼마나 넘보다 잘했는지 아냐. 바느질도 내가 들먼 잘허고. 날도 매고 짜고(실을 만들어 옷감을 짜고) 몇 가지를 해야 혀. 일만 죽어라고 했제. 그러고 살었다. 사방 간 데가(온몸이) 아파.” 아침에 눈을 뜨면 빨래에 “이가 드글드글” 할 때라 아침 일찍 일어나 흰 빨래부터 언덕 너머 냇가에 가서 초벌 빨래를 했다. 그 뒤 젖은 빨래를 다시 이고 와 가마솥에 넣어 빨래를 삶았다. 삶은 빨래를 두고 점심을 차려 먹고 그 빨래를 다시 언덕 너머 냇가에 가서 헹궈와서 널었다. 이제 검은 빨래 차례가 되었고 흰 빨래처럼 빨고 삶고 헹구고를 반복했다. 복덕은 “시방 사람들은 고로코롬 살라고 하믄 하나도 살 사람 없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복덕은 열일곱에 결혼한 후 7년 동안 아이를 갖지 못했다. 밭일에 언덕 너머에 있는 냇가에 하루 왕복 4번을 다녀야 하는 빨래와 하루 3끼 밥 차리기, 옷감 짜고 바느질하는 극한의 노동을 해 가계를 일으켰으면서도 “아이 못 낳는” 무능한 몸으로 취급받았다. 결혼 생활 7년 차에 접어든 그해 복덕은 직접 옷을 지어 남편을 장가보냈다. 복덕은 “그때는 다 그랬다”라고 말한다. 복덕은 그 후 친정집으로 돌아와 지냈다. 남편의 두 번째 아내는 한 달 후 바로 임신을 했고 다음 해 여자아이를 낳았다. 새 장가 후 3년이 지난 어느 날, 남편이 친정 동네로 찾아왔다. 그가 친정에서 하루 자고 간 그날 복덕은 그녀의 아들, 혜원의 아빠 상영을 임신했다. 복덕은 그 후 배가 불러오고 나서야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다.     


복덕의 임신 소식을 들은 동네 친한 부인네들이 복덕의 집으로 한걸음에 달려왔다. 그녀들은 마당에서 빨래를 널고 있던 복덕에게 달려와 “젖을 짜서 쭉 앞으로 나가믄 아들이어야”라고 했다. 그들은 마당 한 가운데에서 복덕의 옷을 열어 가슴을 쭉 눌렀고 젖이 정말 앞으로 쭉 나갔다. 그제야 그들은 복덕을 얼싸안고 아들이라며 난리였다. 복덕은 결혼 후 10년만인 스물일곱 살이 되어 아들을 낳았다. 복덕은 그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그라고 느그 아빠가 태어났는디 월매나 깎아놓은 것 맹키로 이쁘게 생겼다고. 온 곡성이 떠들썩했제. 동네에 나가믄 사람들이 잘생겼다고 난리였어야.” 했다. 복덕은 아들을 낳은 후에도 남편과 따로 살아야 했다. 돈을 번다고 부산으로 떠나버린 남편은 그곳에서 여자를 여럿 사귀었고, 고향으로 내려와 보질 않아 살림은 날로 힘들어졌다. 복덕은 남의 논 빌려서 하는 농사일을 하며 근근이 살림을 해나갔다. 사람들이 남편도 바깥으로 도는 마당에, 고생만 하지 말고 다시 시집가도 잘 살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그래도 지 어미가 해주는 밥은 먹고 살아야” 한다며 혼자 아이를 키우는 괴로운 마음을 다잡았다고 말했다. 복덕은 흐느꼈다.     


복덕은 아들이 커가면서 맘고생을 많이 시켰다고 했다. 농고를 졸업한 아들이 돈을 벌어보겠다고 구례에 가서 산수유나무를, 장흥에 가서 벽오동 나무를, 순천에 가서 철쭉 작업을 하지만 거래가 매번 틀어지는 바람에 돈을 많이 날렸다. 복덕은 “아무런 철도 없이 엉뚱헌 일을 저지르고 한께로. 장가가서 밥해줄 놈만 있으믄 장가보낸다고 했다.”고 말한다.     


그런 복덕은 아들 상영이 정작 25살이 되어 결혼하겠다며 여자를 데리고 오는 바람에 깜짝 놀란다. 내줄 살림이 아무것도 없는 와중에 결혼하겠다는 아들이 “속창시가 없다(철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아가씨가 키도 크고 살결도 좋아서 첫눈에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상영과 순자를 결혼시켰다. 복덕은 할 줄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아들 내외를 밥해 먹이느라 애를 썼다. 아들 상영은 신혼 초 수입 물건(지금의 바디 클렌저)을 떼다 팔러 전국을 돌아다니느라 자주 집을 비웠다. 벌이가 영 좋지 않아 돈이 없을 때였다. 어느 날 아들이 아는 형님이 하던 식당을 받아서 하고 싶다며, 돈 5만 원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 돈을 안 해주면 집에 감옥 딱지(압류)가 붙는다고 숨넘어가는 소리를 하고. 징허게 난리를 쳐가꼬” 복덕은 20리(약 8㎞)가 넘는 길을 걸어가며 돈을 빌리러 다녔다. 조합에 논 두 마지기를 저당(담보) 잡히고, 장흥으로 소를 사고 팔러 다녀야 하는 사람에게도 돈을 빌리기까지 했다. 복덕은 “나는 그때 돈 빌려준 사람들을 형제 맹키로(형제 같이) 생각헌다 지금도. 그 사람들이 돈을 안 해줬으믄 우리가 어찌고(어떻게) 식당을 했을꼬.” 하며 가슴을 쓸어내린다.     


아들 내외는 식당을 광주에 차렸다. 복덕은 식당이 자리 잡히는 동안 곡성에 머물며 손녀 셋을 키웠다. 이후 9년이 지나서야 식당은 자리를 잡았고, 복덕은 그해 63년을 살던 고향을 뒤로하고 광주로 올라왔다. 연중무휴 식육 식당을 운영해야 하는 아들 내외를 도와 손녀 셋을 키우고 집안일을 해주기 위해서였다. 혜원이 가진 복덕에 대한 기억은 그녀의 광주살이와 함께 시작된다. 복덕은 “광주에 올라와서 살게 될 줄은 몰랐다”고 말한다. 그 후 아들 손주가 태어나 “이놈 초등학교 졸업은 시키고 내가 죽어야 헌디.”하고 말하던 복덕은 그 손자가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취업하는 모습까지 보게 된다. 그리고 손녀 셋은 모두 결혼했고, 증손주는 셋이나 되었다. 올해 94이 된 복덕은 아직 요강을 스스로 비우고 대변을 화장실에서 보는 것을 고집한다. 아직 아이가 없는 혜원에게 어서 아이를 낳으라며 재촉하기도 한다. 여자는 아이를 낳아야 한다며 눈시울을 붉힌다. 아이를 못 낳아 미움받으며 살지 않을까 걱정이다. 복덕은 또 곰곰 생각하다 “아니여. 그냥 코로나인가 뭐시기인가 지나가믄 임신해야 쓰겄그만.” 한다.     


혜원은 복덕에게 마지막 질문을 한다. “천국에 가면 누굴 제일 만나고 싶”냐고. 복덕은 말한다. “우리 식구들이 제일 보고 싶제.” 혜원은 묻는다. “할머니 친정 식구들이 제일 보고 싶어?” 복덕은 기력 없이 누워 대답한다. “친정 식구는 무슨. 우리 식구들. 우리 식구들이 젤로 보고 싶제. 내가 느그들 다 이라고 잘 컸다고 자랑도 하고.” 모로 누워 여러 번 강조해 말하던 복덕은 갑자기 엉엉 울기 시작한다. 복덕은 식구들 탓에 “징하게 고생만” 했으면서도 그들을 미리 그리워하며 펑펑 운다. 복덕이 그렇게 크게 우는 모습을 처음 마주한 혜원은 조용히 복덕을 따라 운다. 그리고 복덕의 답을 뒤늦게 이해한다. 복덕의 아들 상영, 며느리 순자, 큰 손녀 혜진, 둘째 손녀 혜미, 셋째 손녀 혜원, 막내 손자 판승을 떠올리며 파르르 떨리는 복덕의 팔을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얼마 만인지 모를 복덕의 울음이 오래오래 터져 나온다.     


인터뷰 후 몇 주가 지난 지금도 혜원은 복덕과의 대화를 모두 기억하고 있다. 대화를 복기할 필요가 없는데도 괜히 이어폰을 귀에 꽂고 그날 녹음된 파일을 재생시킨다. 한참 뱉어낸 울음 뒤에 녹음된 복덕의 숨소리를 듣는다. 혜원이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 “내가 쓰라고 돈이라도 줘야 한디.”하는 소리를 애틋하게 주워듣고, 끄응 거리는 신음 소리를 아프게 담아듣고, 평온하게 마시고 내뱉는 복덕의 숨소리도 듣는다. 혜원은 소리를 조금씩 더 키운다. 복덕이 바로 옆에서 숨 쉬고 있는 듯하다. 그들은 아직 이별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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