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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mang Sep 07. 2022

사랑하는 나의 늙은 여자 둘

이야기의 시작


• "인생이 연기처럼 사라지네." 엄마는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저미는 듯해 그 고통을 감히 느낄 수조차 없을 것 같아. "정말 그렇네." 나는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제대로 살지도 않았는데 세월만 가버려."
엄마의 부드러운 얼굴이 결심이라도 선 듯 확고하고 단단해진다. 나를 보더니 강철 같은 목소리로, 이디시어로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네가 다 써봐라. 처음부터 끝까지, 잃어버린 걸 다 써야 해."
우리는 말없이 앉아 있다. 우리는 끈끈하게 얽힌 혈육이 아니다. 살면서 놓친 그 모든 것과 연기 같은 인생을 그저 바라보는 두 여자다. 엄마는 젊어 보이지도 늙어 보이지도 않고 그저 당신이 목도하고 있는 바, 그 혹독한 진실에 깊이 침윤되어 있다. 엄마한테 내가 어떻게 보일지는 나도 모른다.(비비언 고닉, <사나운 애착>)

오늘의 이야기

무릎이 아플 정도로 심하게 자라던 날들. 나의 중학생 시절 엄마는 여름이 되면 더위를 피하려고 안방을 나와 거실에서 잠을 잤다. 어느 날, 할머니 방에 들어가 할머니 옆에 딱 붙어있는 나를 엄마가 불렀다. "여기 와서 자. 거실은 하나도 안 더워." 마르고 늙은 할머니의 품이 익숙한 나는. 살집이 두텁고 가슴이 큰 엄마 옆이 어색하기만 했다. 분명 더위를 이기려고 너른 거실로 나왔을 텐데. 엄마는 옆에 누운 나를 꼭 끌어안고 한참을 놓아주질 않았다.

할머니에게는 나지 않던 콜드크림과 로션 냄새가 났고. 샤워로도 씻기지 않는 고기 기름 냄새 같은 것이 떠올랐다. 넉넉하고 헐겁게 안아주던 할머니의 팔과는 다른 완력과 슬픔이 느껴졌다. 숨을 크게 쉬어도 되는지 목에 든 힘을 풀고 엄마의 팔에 머리를 맘껏 기대도 되는지 잘 모르겠는 시간을 보내다 보니. 엄마는 쿨쿨 잠이 들었고 나는 방으로 다시 들어가고 싶어졌다.

돌이켜보면 엄마는 어쩔 수 없이 돈을 벌기 위해 나와 형제들을 할머니에게 맡기며. 우리와 연결되어 있는 애착도 함께 할머니에게 양보해버렸는지도 모른다. 돈을 벌며 건강도 젊음도 빼앗겨버리는 줄 모르고 시간을 지나왔을 텐데. 어느 것 하나 남은 것이 없다고 생각했을, 혹은 지금도 그렇게 생각할 엄마를 위해 나도 뭔가를 써보고 싶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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