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절은 못하니까 욕이라도 해야지
공대여자 사회생활
지난 한 주간 병가를 사용했다. 후임이 내 자리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다음이라 뭔가 반항심에 쉬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 싶어 타이밍이 좋지 않은 것 같았지만, 별 수 없었다. 급성 두드러기가 호전되지 않아 밤에는 잠을 편히 잘 수가 없어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였으니까.
병원에서는 급성 두드러기가 이제는 만성 두드러기가 되었다는 진단을 내렸다. 속상한 마음에 외래 진료 중 교수님 앞에서 그만 펑펑 울어버렸다. 원인을 찾지 못하는 두드러기가 30프로 이상인데, 최근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냐며 티슈를 뽑아 건네며 물어보셨다. 대답도 잘 나오지 않아 눈물을 티슈로 꾹꾹 눌러가며 끄덕끄덕 했다. "에고, 마음을 편히 가져야 해요." 하시며 위로해주셨다. 다시 알레르기 약을 먹게 된 지 한 달, 두 달이 가까워지니 얼굴도 부어오르고 체력도 떨어졌는지 오후 4시가 지나면 자리를 지키고 앉아있기가 힘들어졌다.
급성 두드러기로 인한 기도부종으로 호흡곤란까지 와서 입원을 했던 건데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는 회사분들에게는 그냥 여직원의 나약함이라고 치부될 것 같아 걱정이었다. 나약함이고 나발이고 네가 죽겠는데 누구 눈치 보냐는 친구의 말에 용기를 냈다. 그나마 가지고 있던 병아리 눈곱만 한 용기를 짜내서 얻게 된 1주일의 병가를 마치고 나서 복귀를 앞두고도 크게 호전되지 않아 어찌해야 하나 걱정하며 출근을 꾸역꾸역 했다.
복귀해보니 직원분들의 자리 배치도, 업무분장도 이미 변경된 내용으로 결재까지 완료되어 있었다. 다행히도 나는 자리를 바꾸는 번거로움은 피할 수 있었고, 나를 포함한 업무분장이 대대적으로 진행되어 후임과 팀이 맞바꿔졌다는 굴욕감은 약간이나마 묻힐 수 있었다. 후임이 나와 팀을 맞바꾸었기에 각자의 업무를 맞교환하게 되었고, 담당 사업의 추진 현황에 대한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월요일 업무가 시작되었다. 내가 애정을 가지고 있었던 사업, 애증을 가지고 있었던 사업, 분노밖에 남지 않은 사업들이 후임에게 넘어갔다. 정 붙이기 힘들고 낯선 사업에 대한 설명을 전해 듣다 보니 힘이 들었고, 정들었던 내 업무들이 떠올라 더 속이 상했다.(제발 업무를 조금이나마 덜게 되었다고 생각하란 말이다!)
배정된 업무가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업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중, 후임이 배정된 업무가 많은 것 같다며 이야기를 꺼냈다. 팀장님께도 운을 띄워놓았다고도 덧붙였다. 머리가 띵하니 울렸다. 후임이 정신 차리라며 내 이마에 딱밤을 날린 것 같았다.
회사에서 주는 일, 다 해야 하나요?
하고 후임이 나를 혼내는 것 같았다. 나이 때문에 서로 존대를 해야 하기에 나는 후임에게 "아, 그렇긴 하죠. 업무분장은 바뀌었지만 제가 하던 건 최대한 해볼게요." 해버렸다.
이런, 니미럴
평소 일을 하다가 잘 풀리지 않거나, 업체에서 나를 무시하는 것 같을 때, 동료들이 나를 배려해주지 않을 때, 누군가의 눈치를 보지 않겠다고 큰소리쳐놓고 나도 모르게 상대방의 비위를 맞춰가며 굽신굽신 눈치를 봐버렸을 때 나는 속으로 '이런, 니미럴'하고 화를 삭인다. 정말 힘들고 열 받은 날에는 '니미럴, 니미럴 , 니미럴 럴럴럴럴럴럴 니미럴!!!!!'하고 몇 번이고 대 뇌어 본다. 그럼 면전에서 욕을 해버린 것만 같아 그나마 속이 후련해진다. 몇 달 전에 한 번은 잘못된 점을 빙빙 돌리며 뺀질거리는 업체 직원 탓에 화가 나서 이것들이 여자라고 나를 무시하나 싶어 버릇처럼 속으로 '니미럴 니미럴' 외쳐보려고 머릿속으로 그 단어를 꺼내는데 "이런, 니미럴!" 하는 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려버렸다. 아..... 분명 속으로만 이야기하려던 건데 왜 내 귀에 들려버리는 거지. 하던 차에 후임이 조용해진 것 같고 온 사무실이 내 말이 귀를 기울이는 것 같았다. 아. 내가 입 밖으로 내뱉어 버렸나. 아 이제는 속으로도 욕을 못하겠구먼. 하고 생각했다.
지난 월요일, 복귀 후 후임의 업무 과중에 대한 민원을 접수하고 나도 모르게 굽신거리며 제가 조금 더 노력할게요! 라며 민원 해결을 우선 하고 보니 가장 처음 떠올랐던 말이 '니미럴'이었다. '니미럴, 결국 이렇게 되어버렸군. 이 일, 저 일 다 맡게 되면 쉬는 건 언제 할 건데 이 멍청이야.'라고 생각했다. 결국 돌아오는 건 무르디 무른 나에 대한 자책이었다.
자책 이후에는 이상하리만큼 도리어 슬퍼졌다. 내가 후임처럼 회사생활을 했어야 했구나. 저렇게 생활했으면 두드러기가 생기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무엇보다 담백하고 당당한 후임의 말투, 목소리, 표정이 내내 떠올랐다. 너무 묵직하지도, 감정에 호소하지도 않으면서 저렇게 이야기해야 하는 거구나. 저렇게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을 보호해야 하는 거구나.
회사에 있다 보면 종종 목구멍과 혀뿌리 사이 어딘가에 담이 온 듯 목이 답답하다. 꿀꺽 삼켜서 넘어갈 것 같으면 그렇게라고 하고 싶은데 형체 없는 무언가가 꽉 막혀있는 기분이다. 한숨이라도 쉬어봐야 하나 싶다가도 그러면 땅이 꺼져버릴 것 같고 바쁘다고 생색내는 것 같고 또 양 옆자리 직원들 눈치만 보다가 숨을 마시고(Inhale) 코로 천천히 내뱉는다(Exhale). 콧구멍 사이로 천천히 내뱉는 숨이 주변에서는 더 신경 쓰이려나..(제발 눈치 좀 그만 봐라. 자매여.)
3년 반 전, 중고 신입이었지만 새로운 조직에 막 적응하고 있던 병아리 신입 때였다. 사수님은 개인 사정으로 1년간 휴직을 내게 되셨고 정확히 2인분의 일이 나에게 배정되었다. 워낙 소수직렬이고 대체할 만한 인력이 없었기에 10개가 넘는 공사 현장과 기타 인허가 업무가 고스란히 나에게 돌아왔다. 그때의 나는 지금보다 더 무르디 물러서 '당연히' 내가 다 해야 하는 줄 알았다. 소수직렬이라 사수님의 일을 내가 다 쥐고 해 나가야만 나중에 돌아오실 때도 우리 직렬의 입지가 어느 정도 유지될 거라 생각했다.(신입 주제에 무슨 오지랖?)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아주 개똥 같은 생각이었다. 당장 내가 일주일 내내 야근을 해야 하고 주말까지 매달려야 겨우 해나가야 하는 업무량이었는데. 꾸역꾸역 해나간다고 '오 공대여자 리스펙'하는 게 아니라 '오 이 정도를 해내네? 그럼 더 줘볼까?' 하게 된다는 걸 왜 몰랐을까. 역시 일은 하는 사람만 하는 거구나.
회사에 입사하고 나니 딱 1명 뽑는 우리 직렬 신입직원 선발에 안 그래도 바쁜데 남자 직원이 아닌 여직원(나)이 뽑혔다며 직원들의 반발이 컸다고 전해 들었다. 예전 회사에서 '여자라는 사실로 눈치 보이는 상황'은 졸업하고 왔다고 생각했는데, 내 의도와는 달리 그래도 여직원이지만 토목직이니 소주 3병은 마시겠지. 깡다구는 있겠지, 경력이 있으니 뭘 시켜도 잘하겠지. 하는 선배들의 희망사항이 모여 나는 이미 소주 3병은 마실 수 있는 걸걸한 공대여자로 세팅되어 있었다. 부서 배치받자마자 들었던 이야기가 "오 공대여자~ 자네. 소주 3병이 주량이라며?"였으니, 벗어나고 싶었던 아등아등 남자 직원과 나 스스로를 비교하는 사회생활이 또 무한 반복되겠군
싶었다.(어느 누구도 그렇게 시키지 않았는데 말이다)
미혼 남자 직원에게 회사에서 거는 기대는 크다. 회사 내부적으로 다른 부서에서 행정직 직원을 받을 때 열정이 넘치고 업무에 적극성이 있는 미혼 남직원을 선호한다는 이야기가 자주 들린다. 당시 내가 부서 배치를 받았을 때 선배들이 얼마나 실망했을지 이해가 간다. 심지어 나는 기술직이었으니 오죽했을까. 그래서 여직원인 내가 선배들을 실망시키지 않기 해서 두 번째 직장인 이 회사에서도 항상 YES! YES! 하고 홀리듯이 외치고 다니기 시작했다. 선배들에게 '이것 봐요. 남직원보다 내가 낫죠? 그렇다고 이야기해주세요. 어서요.'하고 바라듯이 정말 너무 힘을 꽉 주고 지내왔다.
회사는 너를 대체할 사람이 있지만, 너의 가정에서는 너를 대체할 사람이 없어. 너만 생각해
내가 우울해 보여 걱정이 되었는지, 림이가 전화를 해서 나에게 차분히 조언을 해줬다. 주변 신경 쓰는 일을 그만 멈추고 너 자신을 조금 챙겨주라고. 직장이 남초다 보니 예쁨 받고 편하게 드레스 입고 다닐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이 있었다. 그래도 안정적인 직장이니 너의 불만은 배가 불러서 나오는 투정이라고 하는 지인들도 있었다. 주먹을 항상 꽉 쥐고 인정받고 사랑받고 비교당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으면서 정작 나는 나를 사랑해주지 않았구나 예뻐해주지 않았구나 싶은 생각에 림이가 걸어준 전화에 대고 또 펑펑 울었다.
회사에서 1주일 쉬는 게 눈치 보인다는 나에게 큰언니는 내 마음을 어찌 알았는지 "제부가 많이 사랑해주잖아. 그리고 언니도 많이 사랑해주고. 너무 애쓰지 말자." 한다.
자신의 자존감을 위협할 만큼 힘 있는 존재는 이 세상에 따 하나, 자기 자신뿐이다. 자기 가치가 낮아지는 일은 스스로를 깎아내릴 때만 일어난다. 그러므로 진정한 해결책은 바로 잘못된 자기 내면의 학대를 끝내는 것이다.
- 필링 굿
목구멍과 혀뿌리 사이에 꽉 막혀있는 것이 내가 내뱉지 못한 욕인지, 내뱉지 못한 한숨인지. 이제는 크게 "니미럴"도 하고 "할 일이 너무 많아요. 힘들어요."도 해가면서 꽉 쥔 손가락 힘을 조금 빼주는 연습을 해야지. 나도 예쁜 딸이고 동생이고 친구고 소중한 아내니까. 무엇보다 나에게 예쁨 받는 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