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목직 공대여자(aka YES걸)

열심히 일하다가 주름만 늘어난 여자의 좌절

by mamang


효율적인 조직 운영을 위해 그만 비켜주시지요(배신당한 YES 걸)


팀장님 : "공대여자 ~ 조만간 업무분장을 다시 하려고 하는데."
공대여자 : "네, 팀장님 말씀하십시오."
팀장님 : "자네가 그동안 고생도 많이 했고, 그래서 말인데 자네 후임을 자네 자리로 옮기게 하고 자네는 옆 팀으로 옮기는 게 어때? 자네 생각은 어때. 자네도 쉬어야 할 것 같고 배려해주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공대여자 : "아. 제가 기획에서 사업파트로 옮기셨으면 하시는 거죠? 음. 우선 미리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팀장님 말씀하신 대로 따르겠습니다."


세상 쿨한 척 팀장과의 면담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엄청나게 울었다.(몹시 창피하지만 사실이다. 인정!) 업무를 조금 덜었다고 생각해버리면 될 텐데, 평소 무리를 해서라도 이것저것 손에 꼭 쥐고 놓지 않으려고 했던 터라 내가 좌천된 것만 같았다. 내가 일하던 기획 파트에서 사업 파트로 넘어간다는 것은 후임이 나보다 업무에서 인정을 받았다는 것처럼 나에게 받아들여졌다. 실제로 내가 병원에 입원을 했던 지난 1월 이후 남자들분들의 술자리에서 먼저 논의가 되었던 걸로 미리 전해 들은 게 있어서 안 그래도 더 속이 상해있던 터였다.(왜 하필 내가 없는 그들만의 술자리에서 쿵짝쿵짝 이야기가 된 것인가! 자격지심으로 똘똘 뭉친 나는 그 또한 곱게 보이지 않았다.) 예상은 하고 있던 통보였는데, 실제로 들으니 더 기가 막혔다. 처음 들었던 생각이 "나한테 어쩜 이래? 내가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 내가 얼마나 많이 참고 많이 노력했는데!!"




당신은 선택은? YES 맨 vs NO 맨


세상에는 다양한 종류의 직장인이 있다. 조금 더 세분화해서 들여다보면 2가지로 분류해볼 수가 있겠다.

YES 맨 그리고 NO 맨


여기에서 YES 맨은 조직에서 원하는 바와 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항상 함께하고자 하며 '조직과 나는 운명공동체!'라는 신념 하에 최선을 다해서 나를 조직을 위해 소진해나간다. 이들은 회사 동료들의 협업 요청이나 상사들의 업무지시에 항상 YES! 를 외친다.

반면에 NO 맨은 YES 맨과 나아가는 방향이 다른 모든 사람들을 의미한다. NO 맨들은 "가족이라 하지 마세요. 내 가족은 집에 있어요"라는 신념을 가슴속에 항상 품고 있다. 예를 들면 "회사에 사람 사귀려고 온 거 아니다, 돈만 아니면 회사에 올 일이 없다. 부서장님도 퇴직하면 그냥 아저씨다"라는 조언을 해주는 선배들이 이에 해당한다. 이들은 회사에 항상 반기를 들지는 않지만, 회사의 요구에 유연하게 대처하고 공로는 자연스레 YES 맨들에게 쥐어주며 그들의 사기를 우쭈쭈 더욱 올려주고 본인은 적당히 일하고 적당히 인정받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가장 중요한 점은 회사의 평가에 일희일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YES 걸'이라 쓰고 '야망녀'라 읽는다


지난 9년간의 사회생활에서 나는 YES걸이 되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남자 직원이 대다수인 직렬 특성상 '군대를 다녀오지 않은 여직원'으로 그들의 세계를 이해하려면 당연히 모든 걸 과하게 무리해서라도 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 마음 안에서, 동료들의 마음 안에서 나는 '동료'일뿐이지 못하는 게 있을 수도 있는 그냥 '여직원'으로 존재하고 싶지 않았다.

수직으로 세워진 6m가 넘는 거푸집(콘크리트 구조물을 만들기 위해 미리 짜 놓은 틀)도 아무렇지 않은 척 기어올라가고(사실 나는 고소공포증이 심하다), 당일에 통보받은 회식자리도 빼지 않아야 하며, 자리에 끝까지 남아서 노래방에서는 팔에 멍들게 탬버린을 흔들어줘야 '이래서 여직원은 안돼!'라는 말을 듣지 않겠지. 하고 생각했다. 야근이나 밤샘 모의 훈련 같은 것에도 당연히 자진해서 가장 열심히 나서야 나를 여직원이 아닌 그냥 동료로 봐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며 생활했다. 모든 생활이 그냥 YES! YES! YES! 였다.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이 없겠네
- 류시화,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내가 여자니까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나를 싫어하겠지?' 물론 나의 이런 생각은 나 스스로 넘겨짚어 생각한 것이다. 돌이켜보면 남자 직원분들은 내가 도저히 들지 못하는 무거운 물건을 들어야 하는 일이나 상사들이 여직원들 눈치가 보여서 시키지 못하는 허드렛일을 감수하고 있다는 생각은 그 당시에는 전혀 하지 못했다. '눈에 보이는 티 나는 일들을 억지로라도 내가 해내면 남자들에게 대체당할 일은 없겠지.'라는 짧은 생각에 그렇게 나는 나를 소진해가는 시간들을 보내왔다. 그 무렵부터, 이봐요. 저 이렇게까지 하고 있어요. 보고 계시나요? 저 여! 직! 원! 인데도 이렇게까지 하고 있다고요!라고 오버에 육바를 하면서 업무에 임했다. 생각해보면 남직원들은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묵묵히 해왔던 일들을 내가 너무 오버를 해가며 하는 바람에 얼마나 황당한 경우들이 있었을까 싶다. 나에게는 항상 애쓰면서도 인정받고 싶고 보상받고 싶은 마음이 있었으니 묵묵히 해왔다는 것과는 아주 거리가 멀었다. 자연스레 내가 '해낸'일들에 칭찬이나 격려가 따라오지 않는다면 몹시 실망했고, 애쓰기의 강도를 높여갔다. 진정한 동료로 인정받고 싶다며 헛물만 켜댄 격이니 몇 발짝 떨어져서 지켜보니 이제야 제대로 보인다. 오죽했으면 첫 회사의 나이 많은 남자 후임들이 나에게 '야망녀'라고 놀리기도 했으니 애쓰는 내가 꽤나 가여워 보이기도 했던 것 같다.





담배 끊었습니다


내가 딱 하나 배우지 못한 게 있다면 담배였는데, 사실 아직도 이 부분이 정말 아쉬울 정도다. 현장에서 시공사 직원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잘 풀리지 않으면 멋지게 담배를 꺼내 들고 그들 앞에서 담배를 태우며 어른답게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상사분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내가 진짜 담배만 배우면 남자들처럼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나는 담배를 태우는 옥상에서 나눠지는 정보들에서 배제되고 싶지 않았는데, 평생 담배를 끊지 못하는 아빠처럼 나도 달고 살게 될까 봐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결국은 담배를 피우지도 않고 옥상으로 따라가서 내가 옆에 멀뚱히 서서 이야기에 조금 끼어들어보려 기웃거려보기로 했지만 영 민망하기도 했고, 나 때문에 이야기를 편하게 하지도 못하는 것 같아 나중에는 옥상에 가는 후임과 팀장님을 부럽다는 생각만 하고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나도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싶다.

지금도 현장에서나 바깥에서 선배들이 남자 후배들에게 불이나 담배를 찾으면 나는 옆에 멋쩍게 서있다가 "아, 저는 끊었습니다. 허허"하면 드립을 치면 선배들은 백이면 백 "허허 공대 여자 센스 보소"하고 한번 웃고 지나간다. 나는 참 왜 이 모양으로 이일 저 일에 나서는지 참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YES걸의 마상(마음의 상처)


그렇게 4년간의 불타는 첫 회사 생활을 마치고 순환근무가 없는 직장을 찾아 이직한 후에는 밤샘 작업이나 비상근무는 거의 없었다. 간만의 중고 신입 생활에 신나게 삐약거리고 있었던 입사 1년 차에 개인 사정으로 1년간 휴직을 하게 된 사수님을 대신해서 2인분의 일을 맡아야 했다. 내가 이걸 징징거림 없이 해내야 '거봐 괜히 여직원을 뽑았어!'라는 말을 안 듣겠지?라는 몸 쓸 생각으로 뼛속에 있던 'YES걸' 기질을 다시 꺼내 들고야 말았다.(입사 당시 딱 1명을 뽑는 토목직렬에 여자인 내가 뽑혀서 당시 선배들의 반발이 정말 심했다고 한다. 이를 전해 들었던 차라 유독 주변의 눈길이 신경 쓰였다. '그래, 어디 한번 얼마나 잘하나'하는 무서운 눈길 말이다.)

이후 일을 마구 받아먹은 탓에 두 번째 회사에서의 일복 잔치도 시작되었다. 언제든 항상 '비교'와 '넘겨짚는 성향'이 문제다 문제.


그렇게 또 YES 걸로 활약하며 무리를 하다가 지난 올해 1월 결국 병을 키우게 되는 바람에 입원을 하게 되었다. 언제 생길지 모를 나의 공석이 불안하기도 하고, 언제 임신을 하고 출산할 일이 생길지 모를 기혼여성인 나를 다른 팀으로 옮기는 게 어떤지 팀장님이 제안을 했다고 전해 들었었다. 남직원들만의 회식자리에서. 물론 그들의 오피셜은 '내가 걱정이 되어서'인데. 팀을 바꾸면서까지 받는 배려는 그다지 유쾌하지가 않았다.


절대 후회하지 마라. 좋았다면 추억이고, 나빴다면 경험이다
- 캐롤 터킹턴




이왕 이렇게 된 거, 나는 더 이상 회사의 눈치를 보지 않기로 결심했다. 내가 충성을 다 한만큼 나의 노고를 알아줄 거라 기대했던 지난날의 과오를 이 곳에 내려놓고자 한다. 또한, 회사와 나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나만의 의식(Ritual)을 치르려 한다. 다음에 이어질 글을 통해 그간 YES 걸로 지내왔던 나의 역사와 힘든 과거를 다시 되짚어보겠다. 또한, 지난 과오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다잡겠다. 나는 다시 YES 걸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며, "내 가족을 집에 있어요. 가족이라 하지 마세요."를 마음속에 깊이 새길 것이다.

회사 생활에 너무 목매지 않기 위해서는 꼭 자신만의 취미생활(요즘은 사이드프로젝트(Side Project)라는 멋진 말이 있다)이 있어야 한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통해서 회사라는 세계는 생각보다 좁고, 바깥세상은 생각보다 넓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기 때문이다.



아직도 조직에 충성하고 있는 우리 가련한 YES맨/걸들이 하루빨리 회사의 그늘에서 벗어나 콧구멍에 바깥공기를 마음껏 넣어줄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겠다. YES 인들이여 봉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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