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명예 남성되기 수난사, 그 시작
토공녀-토목직 공대 여자
첫 출근을 하면서 머리를 커트에 가깝게 더 짧게 자르면서 나는 다짐했다. 말투를 '다, 나, 까'로 쓰기, 선배들이 퇴근하기 전에는 집에 가지 않기, 회식에서 꼭 끝까지 남아있기, 치마 입고 출근하지 않기.
여성성을 최대한 숨기고 내가 하는 '일'로만 나를 표현하고 싶어서 생각해낸 것이었는데. 일해본 경험이 없다 보니 몇몇 다짐은 무용지물이었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감독님. 여군 출신이십니까." 시공사 공사 차장님이 현장에 가면서 나에게 물었다. 나는 "네? 왜 그러십니까?" 하고 물었다.
"아니요. 처음 현장 오셨을 때 머리도 짧고 말투도 다, 나, 까만 쓰셔서요."
여감독 여군이었던 썰은 한때 현장에서 도는 소문처럼 지나갔고, 아무도 나를 본인들과 비슷한 사람으로 생각해주지 않았다.
선배들이 퇴근하기 전까지 집에 가지 않는 건 토목 현장에서 기본으로 생각하는 마인드여서 다짐이라고 할 것도 없었고. 회식에서 끝까지 남아있는 것은 부서장 옆으로 항상 지정받던 자리에 부서장의 고기를 구워주며 술잔이 비면 항상 채워야 하는 걸 의미했고. 부서장 자리로 인사하러 온 선배님들이 주는 술을 모두 끝까지 마셔야 하는 결과를 낳았다.
치마 입고 출근하지 않으면 선배들도 모두 나를 본인들과 같은 동료로 생각해줄 줄 알았다. 상의도 가슴이 드러나는 딱 붙는 옷을 입지 않았고, 현장에서 나눠주는 현장 잠바와 여름에는 주머니가 여러 개 달려 있어서 줄자도, 연필도, 장갑도, 토시도 넣어 다닐 수 있는 낚시 조끼를 입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나를 여감독이 아닌 남자로 동일하게 생각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특히 부서장인 우 단장이 문제였다. 현장 특성상, 공사장 안에 있는 함바 식당에서 밥을 먹어야 했는데, 현장 규모가 크지 않아 시공사 직원들과 발주처인 우리 회사 직원들이 한 식당을 이용했다. 현장에서 업무가 잘 조율되지 않으면 얼굴을 붉히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한 곳에서 밥을 먹는다는 것이 자주 불편하게 느껴졌다.
하루는 점심시간이 되어 우 단장을 포함한 우리 부서원들이 함바 식당에 들어섰다. 시공사 직원들은 이미 자리를 잡고 밥을 먹고 있었다. 현장에서 나와 얼굴을 자주 붉히는 품질 담당 직원도, 공사 차장도, 소장도 자리에 있었다. 우리는 시공사 직원들에게 목례를 건네며 자리를 잡고 앉았다. 공사와 마찬가지로 함바 식당도 최저가 입찰로 선정된 곳이었다. 함바 식당이 모두 맛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절실히 깨닫게 해 준 곳이었다. 아무튼 그날 자리를 잡고 앉아 그냥저냥 배를 채우려고 밥을 꾸역꾸역 먹고 있었다. 오늘따라 기분이 좋았는지 우 단장이 너스레를 떤다. 신입 여직원인 내 자리는 점심때나 저녁 회식 때나 항상 우 단장의 바로 옆자리거나 마주보고 앉는 자리다.
"어제 내가 재미있는 걸 봤는데 말이야. (어쩌고저쩌고) 그래서 그 여자가 가운을 확 벗어 재끼는데 글쎄 그 안에 아무것도 안 입고 있지 뭐야. 으화화화 촤화화화" 우 단장은 밥을 먹다 말고 음담패설을 마구 뿌려댔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밥을 먹다가 대충 대화를 듣는 척하고 있었는데. 우 단장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던 차장님만이 대꾸를 해주고 있었다. 우 단장은 밥을 씹고 있던 나를 콕 집어서 반응을 끌어냈다. "자네. 들었지? 글쎄 그 여자가 아무것도 안 입고 있었다니까?"
나는 저 건너편에서 이 상황을 듣고 있을 시공사 직원들의 반응을 살폈다. 당장 오늘 오후에라도 현장에서 이런저런 일로 부딪힐 사람들인데. 나는 이곳, 한 공간에서 한 명의 감독이 아닌 음담패설 앞에 진땀을 흘리는 여자로 전시되고 있었다. 현장에서 함께 땀을 흘려가며 증명하고 싶었던 나의 열심과 노력이 한순간에 우 단장의 농담 한 마디로 모두 물거품이 되어버리는 것 같았다.
몇 달 동안 달리고 달려 저쪽으로 조금 가보려나 했는데 올가미에 묶여 다시 처음 그 자리로 돌아왔다. 여자, 여자, 여자. 계속 이 자리로 돌아와 앉아있기는 싫었다. 나는 까르르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단장니임~ 요즘 그런 농담 하시면 벌금 삼천만 원짜리입니다. 삐용 삐용" 우 단장은 내가 자신의 농담을 털털하게 받아줬다고 생각하며 만족스럽게 껄껄껄 웃었다.
나는 비겁하게도 '나는 이런 걸로 문제 삼는 다른 여자들과 달라'를 시전 했다. 명예 남성으로 저들 틈의 한 귀퉁이에 어깨 한쪽이라도 들이밀고 싶었다. 그들이 이렇게라도 나를 동료로 인정해주길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