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10년 만의 카톡

토공녀-토목직 공대 여자

by mamang
freddy-castro-u3ajSXhZM_U-unsplash.jpg


"뭐하고 지내냐.? 보고 싶다 누구랑 얘기하다 너 얘기 나오는데 포동포동 얼굴만 생각난다 지금 어떻게 지내는지 이거 보면 사진 하나 보내라 근데 정말 잘 살고 있지?"


2022년 4월, 자려고 누웠는데 카톡이 왔다. 10년 전, 나의 첫 발령지에서 기계를 담당하시던 과장님이었다. 메시지를 읽고 잠이 달아난 나는 답장을 한참 고민했다. 현장 마무리 후 모두 뿔뿔이 흩어져 나는 이미 7년 전 회사를 옮긴 터라 딱 10년 만이었다.


2012년 9월, 공사가 마무리되었다. 하천 양옆의 논은 흔적이 없어졌고, 하천 하류에 우뚝 선 콘크리트 구조물이 수문 3개를 든든하게 받치고 있었다. 대형 물그릇으로 다시 태어난 하천은 그해 여름 시범적으로 물을 담는 시험 운영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건설사업단 해체가 확정되고, 부서원은 모두 회사 마크가 박힌 낚시 조끼를 맞춰 입고 가건물 앞에서 단체 사진을 찍었다. 임시 건물 전면에는 이미 얼마 전 완성된 정식 사무실이 들어섰고, 가건물은 얼마 지나지 않아 철거될 예정이었다.


파견 직원 슬이 씨는 부서원들 중 가장 먼저 현장을 떠났다. 보조 인력 파견 용역 사는 슬이 씨에게 간간이 기본 비즈니스 교육 비슷한 걸 시키고, 인력을 관리했다는 명복으로 월급 중 3분의 1을 정당하게 떼어갔는데. 나는 슬이 씨의 파견 기간이 끝나가는 그때까지도, 일은 슬이 씨가 다 했는데 용역사에서 돈을 받아가는 이유를 슬이 씨의 파견 기간이 끝나던 그때까지 이해할 수 없었다.


차장님은 현장에 혼자 남아 행정 절차와 인수인계 매뉴얼 정비 등을 정비하시며 관리 사업소에 인수인계를 완료하신다고 했다. 차장님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본사의 전보 공문을 기다렸다.


전국에 흩어져있는 사업장에서는 부족한 인력을 본사로 보내고 본사에서는 이를 취합해 공평하게 인력을 배분하는 시스템이었는데. 실상 여자 토목직인 나의 경우, 성별을 이유로 받으려고 하지 않는 곳이 많았다. 직속 후배의 다음 근무지가 쉽게 잡히지 않자 차장님과 사수님이 끝까지 마음고생을 하셨는데. 그래도 선배들이 백방으로 알아봐 주신 덕분에 멀지 않은 전남의 다른 지역으로 근무지를 옮기게 되어 모두 다행이었다.


모두의 거취가 결정되자 나는 매일 울었다. 슬이 씨의 송별회가 있던 날, 하나 둘 먼저 짐을 싸서 떠나는 선배들을 배웅해줘야 하던 날, 사무실에서 쓰던 몇 안 되는 짐을 박스에 넣어 내 자리를 비워주던 날 너무 울어 눈과 얼굴이 퉁퉁부은게 창피하다는 것도 잊고 엉엉 울었다.


그때는 분명 함께 고생을 한 탓에 깊은 정이 들어서라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면 나의 모든 처음들을 목격한 이들이라 보내주기 싫은 탓이었던 것 같다.


첫 월급을 받아서 할머니, 부모님에게 뭘 사드려야 할지 함께 의논했던 사람들. 운전은 이렇게 저렇게 해야 한다며 비상등을 대신 눌러주며 훈수를 두던 사람들. 고속도로를 처음 타는 나에게 차 열쇠와 본인들의 목숨을 맡긴 채 부산에서 광주까지 쿨쿨 잠을 자던 사람들.


그리고 나의 사회생활 첫 모습을 포동포동 얼굴로 기억해주는 사람까지.


나는 곰곰 생각하다 답장을 쓴다. 반갑고 감사한 내 마음이 잘 전달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이전 12화11. 적은 우리를 애니팡하게 만들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