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다시 한의원을 다닌다. 서울에서 인천 부평구까지 지하철을 타고 간다. 일주일 한 번 가기로 마음먹었지만 회사 때문에 주중에는 시간을 내지 못하고, 토요일에는 몸도 마음도 주르륵 녹아내리는 바람에 자꾸 미루게 된다. 그래서 오늘은 한 달만에 지어놓은 한약이 모두 떨어지고 나서야 한의원을 찾았다.
지하철을 타고 1시간 정도 이동하는 시간, 나는 책을 펼쳤다.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이미 두 번 읽었고, 이번이 세 번째인데도 새로운 문장들이 3D로 떠오른다. 눈에 눈물이 가득 맺혔다가, 또 식었다가를 반복하며 책을 읽어 내려가는데 20대로 보이는 여성 둘이 지하철에 함께 올라탔다. 트레이닝 복에 두꺼운 겨울 외투를 입고 있었다. 그 둘은 각각 한 자리씩 남은 빈자리에 앉았다. 바로 옆에 앉아야 하는데 두 자리가 비어있는 곳이 없어 별 수 없이 마주 앉은 듯했다. 한 친구의 옆자리에 앉아있던 나는 괜히 눈치가 보였다. '자리를 비켜줘야 하나?' 생각하다가 괜한 오지랖인 듯하여 다시 책으로 눈을 돌렸다. 하지만 이미 내 집중력은 바사삭 깨진 뒤였다.
둘 중 하나가 맞은편 빈자리를 포기하고 내 옆에 앉은 친구 앞에 섰다. 귀에 무선 이어폰을 끼고 있던 친구가 고개를 들며 "왜? 앉아있지?" 한다. 침묵하거나 쉬고 싶은 마음이 약간 드러난 듯하다. "그냥." 하며 일어서 있는 친구가 말을 이어간다. 친구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눈치다.
"그래서. 경태(가명)는 괜찮아?" 집중력이 깨진 상태라 손가락으로 문장들을 짚어가며 겨우 읽던 내가 다시 귀를 빼앗겼다. '경태는 누구지?' 생각하고 있는데 질문을 받은 친구가 답을 한다. "응. 괜찮아. 내가 집을 나서니까 가지 말라고 장난치다가 침대에서 떨어졌거든. 그때 쇄골 쪽을 부딪친 것 같은데. 병원에 다녀오니까 그래도 지금은 나아졌어." '아. 경태가 남자 친구구나. 여자 친구랑 계속 함께 있고 싶었던 남자 친구가 장난을 치다가 침대에서 떨어졌구나. 좋을 때다.' 생각하고 있는데 둘은 다시 말을 이어갔다. 나는 이미 눈만 책에 두고 있을 뿐 둘의 대화를 본격적으로 듣고 있었다.
"나 캐나다 다녀온 다음에 강아지 입양하려고."
경태 씨의 안부를 먼저 물었던 친구가 말을 꺼냈다. "아 정말? 대형견? 중형견?" "경태 같은 대형견 입양하고 싶었는데. 이것저것 생각해보다가, 나는 중형견으로 생각하고 있어."
'응? 경태 씨가 남자 친구가 아니라 대형견이었다고?'
강아지에게 사람의 이름을 붙일 수 있다는 걸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럼 대형견 경태가 쇄골을 다쳤던 거였구나.' 생각하니 내가 생각하던 대로 타인의 대화를 듣고 단정 지어 생각했던 것에 웃음이 났다. 나는 여전히 책의 페이지를 넘기지 못했다.
이어 둘은 캐나다에 있는 언니가 임신한 이야기, 조카의 탄생이 기대된다는 이야기, 경태와 함께 사는 집에 할머니를 포함한 대가족이 사는 이야기에 푹 빠져 듣고 있었다.
둘은 서로의 생일을 물론이고 친구 형제의 생일이 몇 월인지까지 알고 있었고, 친구가 최근 경조사에 찾아다니는 일이 부쩍 많아졌다는 것과 그곳에서 누구를 만났다는 이야기에 함께 반응해주기까지 했는데. 최소 10년 이상 깊게 연결되어 있었던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대화였다. 척하면 척인 이들의 대화를 듣고 있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 편안함을 주었다. 내 옆에 앉아있던 친구는 그들의 대화가 책 읽는 나에게 방해가 되지 않을까 자주 내쪽을 살피는 듯했는데. 나는 이미 책 읽는 것을 포기하고 달달한 우정의 대화를 듣고 있다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다음 장으로 부러 책을 넘겼다.
두 정거장 후 친구 둘이 내렸다. 오래간만에 여행을 가는 듯 둘은 여행용품을 어떻게 챙겨 왔는지 이야기하며 총총 문을 나섰다.
그다음 역에서 종이 신문을 든 중년 남성이 비어있던 내 옆자리에 앉았다. 시선은 신문에 고정한 채 빈자리를 엉덩이 감으로만 찾아 '털썩' 주저앉았다. 신기한 재주였다. 그야말로 '털썩' 앉은 그의 외투가 내 책 왼쪽 귀퉁이를 덮었다. 나는 그의 외투를 손으로 치웠는데, 그는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바람을 일으키며 종이 신문을 넘기고 있었다. 마치 본인의 집중해야 할 유일한 일이 신문을 읽는 것이라 생각하는 듯했다. 몇 정거장 후 그가 '벌떡' 일어나 문을 향해 걸었다. 여전히 시선은 종이 신문을 향해 있었다. 앞으로 몇 발자국 걸어가던 그가 획 고개를 돌려 뒤를 본다. 앉아있던 자리에 뭔가 흘린 것이 없을까 곰곰 살피는 모습이었다.
'털썩' 주저앉으며 타인이 느낄 불편은 개의치 않던 사내가 '벌떡' 일어나 물건을 잃어버려 본인이 느낄 불편만을 살피는 모습이 얄미웠다.
때로 기꺼이 귀 빌려주고 싶은 이야기도 있고, 눈도 귀도 닫고 싶은 행동들이 있다. 오늘은 듣고 싶은 이야기, 보고 싶지 않은 행동이 반반씩 섞인 날이다. 어쨌든 둘 다 공평하게 누렸다고 생각하기로 하고. 읽는 척하며 넘겼던 책을 몇 장 다시 앞으로 돌아가 읽는다. 읽을 책도, 들을 이야기도 지하철에는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