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컬리, 내가 원조여

회사 텃밭 가꾸기(공대여자 말고 그냥 나)

by mamang


동기 : 공대여자야 이번에 지자체에서 텃밭을 분양해주는데 우리 부서에서 분양받기로 했거든. 너도 같이할래?
공대여자 : 아하 텃밭이라. 오빠 진짜 그거 하게? 서울에서 태어난 애들한테는 로망이겠지만, 나는 아니야. 안 할래!


중고 신입으로 시작한 두 번째 회사(이자 지금의 회사)에서 동기 오빠 한 명이 나에게 지원 요청을 했다. 나 시골 출신 아니고 광역시 출신이라고 여러 번 이야기한 게 기억도 나지 않나 보다. 본인 부서 내 신입에게 주어진 막중한 임무를 수행할 계획이니 이 숭고한 자연 친화 정신에 이바지할 생각이 없냐는 것이었다.


"상추, 파, 배추, 고추 등등 엄청나게 많이 심을 수 있는 땅을 무료로 분양받을 거라니까. 너는 그냥 자라는 거 보기만 하고 있다가 수확하기만 하면 돼. 집에 가져가서 그냥 먹기만 하면 된다고." 하고 나를 설득하려 했다. 나는 일장 연설을 시작했다.


"오빠 라테는 말이야. 텃밭 손바닥만 한 게 아니라 구내식당에서 국을 끓여 먹을 수 있을 정도로 키워본 사람이야. 텃밭 얕잡아봤다가는 사람 잡어.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말이지."




때는 바야흐로 사회생활 막 3년 차에 접어들었을 때의 일이었다.


나는 무척이나 바빴던 첫 현장을 겨우 마무리하고 부서를 옮겨가게 되었다. 입사 후 2번째로 발령받았던 근무지의 부서장은 워커홀릭에 야망남이었다. 그는 마침 승진을 앞두고 전력 질주 중이었고, 목표 달성을 위해 전방위로 직원들을 부려 먹고 있었다. 연고가 없는 지방의 부서로 자진해서 온 이유도 승진해서 금의환향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고 건너 건너 들었다.


그 부서에는 토목 파트, 기계 전기 파트, 시설 운영 파트(교대근무)가 있었으며 토목 파트가 주무 파트 역할을 해야 했다. 우리 파트에는 차장님 아래로 대리인 나와 동갑내기 토목 후임 1명, 나이로는 3살 위인 환경직 사원 2명이 있었다. 대충 셈을 해보니 차장님 아래에 있던 사원 중 유일한 '대리'인 내가 이 부서의 살림을 꾸려나가야 하는 형국이라 풀던 짐을 다시 싸야 하나 싶었다.


나의 직속 상사는 구씨 성을 한 차장님이었다. (편의상 미스터 쿠로 부르겠다)


미스터 쿠는 발령받아 온 지 얼마 안 된 나에게 하천 정비공사, 댐 수도시설 운영 매뉴얼, 각종 시절 위기 대응 매뉴얼(도합 16종 이상) 등을 잔뜩 넘겨주었다. 나는 믿을만한 사람이 되지 못할 텐데 이분이 나를 아직 잘 모르는가 싶었다.


첫 현장에서 몸으로 고생을 많이 했지만, 위로는 사람 좋으신 사수님과 차장님이 계셔서 나는 주로 시키시는 걸 하는 게 전부였다. 고백컨데 나는 그 당시 머리 복잡한 일이나 어려운 일이 생길 때는 그분들 뒤에 쏙 숨어있던 적도 많았다. 이제 더 이상 신입이 아니었던 나는 지난 2년간 사수님과 차장님을 고생시킨 데에 대한 벌을 받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사회생활 10년 차인 지금 내가 하나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최악의 부서장은 상사들을 건너뛰고 직원들에게 바로 업무를 지시하고 피드백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새 부서에 조금씩 적응하면서 눈치를 쓱 보니 부서장과 차장님은 웬만해서는 말을 섞지 않았다. 그 둘은 반드시 해야 하는 말 빼고는 잘하지를 않아서 각자 하고 싶은 말을 직원들을 통해서 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부서장은 본인이 생각하는 업무를 한 단계 건너뛰고 직원들에게 바로 전달하기 일쑤였다.


이런 경우 가장 어려운 것은 부서장이 시킨 일을 바로 해내야 하는데 차장님이 급하다고 뭐 하나를 던져주면 어떤 일부터 바로 처리해야 하는지였다. 고민 끝에 직속 상사인 차장님께 자초지종을 설명하면 꿍한 표정으로 알겠다고 내가 시킨 건 그 이후에 하라고 하는데 뒤통수가 따갑고 눈치가 보여서 좌불안석이 따로 없었다.


겨우 사회생활 3년 차이자 대리 1년 차에 나는 부서장 '야망남'과 나의 직속 상사 '미스터 쿠'의 사이에 끼인 샌드위치가 되어갔다. 그것도 풍성한 샌드위치가 아닌 얇디얇아서 고통스러운 샌드위치 말이다.


그렇게 부서장은 자신의 방식대로 마구잡이식 업무를 진행했고, 생각나는 대로 말하며 때로는 그대로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그렇게 야망남이 아무 말 대잔치를 하던 중 떠올랐던 아이디어가 "조직문화 개선을 위한 친환경 텃밭 가꾸기"였다.


나는 "제발 '야망남' 당신이나 개선되었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했다. 물론 마음속으로.


그 무렵 많은 공공기관 사이에서 애니팡만큼 유행했던 게 '조직문화 개선'과 '사회 공헌 활동'이었다. 각 부서들은 나름의 조직문화 개선, 사회 공헌 활동 아이디어를 창출하고 실천했다. 다양한 사례를 본사 차원에서 취합하여 부서 간에 공유를 하기도 하고 나아가 각 기관의 평가에도 활용되었다. 물론 기관장의 평가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우리의 '야망남'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야망남 : 공대여자야 ~ 우리 사회 공헌 활동으로 내년에 뭘 했으면 좋겠어?
공대여자 : 다른 부서나 타 공공기관의 사례를 보니 겨울에는 독거노인분들 김장 김치 증정 행사도 하고요, 또..
야망남 : 김장 김치 좋네. 우리가 키워서 담으면 되겠네. 친환경으로!
공대여자 : 네? 김치를 키운다는 말씀이십니까?
야망남 : 아니 배추를 키우는 거지. 그래서 조직문화 개선을 위한 사례로도 활용하고.


사무실로 돌아와서 전기직 선배 한 분과 후배들에게 이 비보를 알렸다.


"여러분 저희가 밭을 좀 갈아야 하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미스터 쿠의 자리에 가서는 "텃밭을 조성하라고 하시는데 말입니다. 차장님 어떻게 하죠?" 하고 구원 요청을 했더니 "그래. 최선을 다해봐라." 하고 끝이었다.


나의 고향은 전남 저기 어디라지만, 실상은 밭을 갈아본 적도 없고 뭘 심어 본 적도 없었다. 물은 조롱이로 줘야 하는지 비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였는지도 잘 모르겠는데 텃밭을 만들라니.




부하는 '보는 수준'에 따라 다섯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중략) 셋째, 상사가 말한 것의 이면, 즉 의중을 읽고 글을 쓰는 사람이다. 능력 있다는 소리를 듣는다. 넷째, 상사의 말과 겨루고 자기 의견을 제시함으로써 합의안을 도출해내는 사람이다. 조직에 가장 필요한 사람이다. 다섯째, 상사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말을 하는 사람이다. (중략) 마지막 유형은, 본인은 즐겁지만 승진에서 불이익을 받고 오래지 않아 조직에서 사라질 가능성이 크다.
- 강원국, 나는 말하듯이 쓴다


회사마다 내려오는 괴담이 있다. "저 선배 있잖아. 지금은 만년 과장인데 옛날에는 엄청나게 잘 나가셨데. 선배한테 한번 개기고는 그 이후에 찍혀서 동기들 다 승진해도 계속 제자리잖아."


그 무렵 나는 '야망남'이 부서장으로서 미스터 쿠에게 쿠사리를 주는 모습을 바로 옆에서 아주 많이 봤다. 게다가 이전에 있던 현장에서 부서장과의 불화로 인해 미스터 쿠가 이곳으로 발령받아왔다는 것도 알게 된 후였다.


나는 미스터 쿠처럼 되고 싶지 않았다. 미스터 쿠가 도와줄 게 아니라면 나 혼자서라도 밭을 갈고 씨를 뿌려서라도 잘 해내고 싶었다. 미스터 쿠가 받는 쿠사리를 내가 대신 받을 용기도 없었고, 아직 대리 1년 차뿐이라 부서장에게 맞서 대응할 논리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게 친환경 텃밭 가꾸기 계획을 수립하고 결재를 득한 후 본격적으로 심을 작물들을 결정하고 필요한 비료, 농기구(갈고리, 호미 등), 검은 비닐(고추 모종용), 각종 모종, 씨앗을 구했고, 두릅을 좋아하는 야망남을 위해 두릅나무도 특별히 주변 묘목상에서 사 왔다. 물론 텃밭 관련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자리를 비울 때마다 기어가는 목소리로 "차장님 잠시 텃밭 좀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죄지은 사람처럼 다녀야 했던 건 보너스.


직접 일 시키기를 좋아하는 야망남은 경비 반장님께 밭을 좀 갈아달라는 특명을 내렸다. 경비 반장님은 댁에서부터 트랙터를 출동시켰고 우리는 경비 반장님의 트랙터를 따라다니며 갈고리로 긁어모은 돌들을 골라냈다.


경비 반장님의 잔소리를 몇 바가지씩 먹어가며 각종 작물을 심은 젊은 직원들에게 나는 "이제 힘든 일은 끝났습니다. 다들 너무 고생하셨습니다." 했다. 이게 시작인 줄은 정말 몰랐다.




그 후 적당한 비와 충분한 햇빛을 받은 아이들은 날이 갈수록 쑥쑥 자랐다. 급기야 여름이 되니 온갖 작물들이 폭발적으로 커가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배춧속을 채워가며 예쁘게 키우기는 힘들 것 같아 사회공헌 활동용 배추는 별도로 사서 김장을 하기로 했다.


그리고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작물들은 직원 식당에서 대부분 소진하거나 직원들이 각자 수확해서 집에 가져가 먹는 거로 활용하기로 했다. (어쨌든 각종 미사여구를 붙여 '조직문화 개선 사례'에 관한 비계량 지표는 내가 지어서 만들면 되니까. 호호)


처음에는 "우리 구내 직원 식당의 식자재비를 많이 아낄 수 있겠어요. 호호호" 하시던 식당 이모님께서 언제 한 번은 나를 불러서 민원을 넣으셨다.


식당 이모님 : 공대여자~ 나 이러면 식당 밥 못해. 언제 쟤들을 다 따서 식당에서 써? 자라는 속도 봤어? 아무리 우엉을 따서 써도 계속 자라. 상추는 말도 못 하고.
공대여자 : 아! 이모님 죄송해요. 그럼 제가 저희 직원들하고 수확해서 가져다드릴게요.


그날부터 점심을 먹고 나서 휴식 시간을 반납하고 직원들과 수확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직원 식당에서 텃밭에서 난 작물들의 맛을 본 야망남은 나를 조용히 불러 이렇게 말한다.


야망남 : 공대여자야. 이거 우리만 먹기 아깝다. 본부 처장님이 친환경 채소 이런 걸 엄청나게 좋아하시거든.
공대여자 : 아! 네 알겠습니다. 어느 정도 따놓으면 될까요?
야망남 : A4 박스 있지? 그걸로 우선 2개 정도?


그렇게 또 야망남의 업무 지시를 거절하지 못하고 사무실로 돌아온 나는 전기직 김 과장님과 후배 직원들에게 고개를 숙여 말했다. "저 처장님 선물용 야채 박스를 2개만 만들어야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아직 A4 종이가 가득 차 있는 박스를 뜯어다가 비닐을 깔고 한쪽에는 상추, 다른 한쪽에는 고추, 그리고 우엉을 한가득 담았다.


나는 퇴근길에(우리 집에 가는 길은 아니었다) 처장님께서 사시는 아파트의 경비실에 가서 굽신거리며 A4 상자를 맡겼다. "아마 사모님께서 내려오셔서 찾아가실 겁니다. 수고하세요"


쓸데없이 맛있는 상추, 고추, 우엉을 처장님이 맛보고는 여기저기 소문을 내는 바람에 "나는 왜 안주냐"하고 여기저기에서 아우성이었다. 결국 우리는 멀쩡한 A4 종이들을 바깥으로 꺼내놓고 억지로 박스를 비워 친환경 텃밭 채소들로 가득 채웠다. 그렇게 출장을 다닐 때마다, 퇴근할 때마다 박스들을 가득 채워서 여기저기로 배달을 다녔다.


성황리에 여기저기로 나가는 채소들 때문에 직원들은 매일 텃밭으로 불려 나가야 했다. 텃밭에서 일할 때마다 선배와 후배들에게 "여러분 제가 정말 잘못했습니다. 이게 저의 불찰입니다." 하고 고개를 조아렸다.


생각해보니 2013년에 내가 산지 직배송을 했네. 이건 완전 텃밭컬리 아닌가? 2014년에 식자재 배송업을 시작한 마켓 컬리보다 1년은 더 빨리 시작했잖아! 라는 쓸데없는 억지를 부려본다.




한편으로는 상사에게 잘 보이려고 선후배들의 노동력을 착취했던 것 같아서 쓰면서 더욱 미안해졌다.


그리고 또 다른 마음으로는 "그때 진짜 웃겼는데. 처음으로 혼자 오토 트럭을 몰고 비료도 실어 오고. 고추 모종 심느라 고생했던 직원들이랑 먹으려고 수박을 사 오다가 내가 떨어뜨리기도 했는데. 쩍 하고 갈라지지 않아서 괜찮겠거니 하며 몰래 잘라서 내놓았는데 야망남이 수박 육질을 보고는 '이거 떨어뜨린 거지?'하고 말했을 때 엄청 소름 돋았었는데. 우리 집은 고깃집을 해서 상추는 안 그래도 차고 넘쳤고, 자취하는 총각들은 채소 먹지도 않았는데 풀 뽑고 돌도 골라가면서 참 열심히도 가꿨던 게 너무 우습기도 하고. 어떻게 하면 예쁘게 포장될까 하면서 상추를 이리 놓고 저리 놓으면서 함께 고민도 했는데." 하는 이런저런 추억들이 몽글몽글 떠오른다.


공공의 적을 만나면 동지들이 더 단단해진다고 해야 하나. 텃밭컬리 임무를 수행하면서 더 단단해진 우리는 그 후 YB끼리만 가는 야유회를 우리끼리 만들어놓고 종종 놀러 가서는 실컷 야망남과 미스터 쿠를 안주 삼았다.


모든 게 처음이었던 그 시절, 무섭게 자랐던 채소들처럼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함께 쑥쑥 자라고 있었나 보다.


인간은 처음 인연에 매몰된 만큼 성장한다.
- 은유,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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