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치 야근하는 여자

고라니야, 미안해(공대여자 말고 그냥 나)

by mamang


동기 : 공대 여자 퇴근 안 해?
공대여자 : 응. 못하고 있어 ㅠㅠ
동기 : 요즘 계속 야근이네? 일이 많아?
공대여자 : 모르겠어. 나도 내가 왜 집에 못 가는지..


눈치 야근이란 필시 자의가 아닌 타의여야 한다. 무엇 때문에 나의 퇴근이 지연되었는지 몰라야 한다. 나는 분명 내 일을 모두 주간 시간 내에 완료했다. 시간 내에 마치느라 화장실 갈 시간도 없었는데. 귀가를 미루고 계시는 저분은 진짜 바쁜 것인지 야구를 보는 건지 축구를 보는 건지 도대체 알 길이 없다.


그렇다고 "나 집에 가야 하는데 너는 왜 안 가냐?" 하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또 "네가 있거나 말거나 나는 집에 가련다" 하고 박차고 나올 수도 없었다. 흐지부지 이도 저도 아닌 상태로 그렇게 흐리멍덩하게 있다가 집에도 못 가는 눈치 야근을 하다가 굳이 밥에 술까지 먹어야 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사회생활 3, 4년 차에는 정확히 눈치 야근에 부합하는 경우가 아주 많았다.


그때의 나는 왜 집에 당당하게 가지를 못 했던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대략 이렇게 압축된다.


한 줄로 정리해보자면 이렇다.


나는 소심했고, 그는 집에 가지 않는 이유를 설명해주지 않았다.




6시 정각. 슬슬 짐을 싸는 바로 옆 파트와는 달리 토목 파트는 아무도 자리에서 일어나지를 않는다.(선배들 피셜로는 업무 경직도가 국정원 다음으로 토목 회사인 우리라고 했다. 처음에는 다 헛소리인 줄 알았는데 8년 전인 당시에는 일단 선배가 일어나지 않으면 밥을 먹으러 가지도 못했다.)


정확히 내 우측면을 마주하고 앉아있는 나와 나의 상사 미스터 쿠는 파티션을 사이에 두고 눈치 게임을 시작한다. 일단 후배들과 눈알을 굴리며 생각한다. '그는 왜 퇴근하지 않는 걸까?'


경우 1. 그는 저녁 약속이 따로 있다. (난이도 ★★)


저녁 6시 10분, 후배들이 눈으로 주는 응원을 받아 용기를 충전한 나, '마대리'가 대표로 미스터 쿠에게 묻는다.


공대여자 : (염소 목소리) 저 어어~ 차장님. 식사는 안 하시나요?
미스터 쿠 : 응. 나는 됐다. 너희끼리 먹어라.


당시의 나는 "너희끼리 먹어라" 하면 진짜 우리끼리 먹어야 하는지. "먹을 테면 먹어봐라"인 건지 알수가 없었다. 내가 당황해서 후배들을 쳐다보면 엉덩이가 들썩했던 후배들도 이내 마음을 내려놓고 자리에 다시 앉는다. 내가 눈치를 주면 막내가 식당에 가서 토목 파트는 오늘 저녁을 안 먹을 것 같다고 전달하고 온다.


여기에서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그가 오늘 따로 저녁 약속이 따로 있어서 식사를 안 하는 것"이길 바라는 것이다. 이런 경우는 경우 2까지 가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자유를 찾게 되니 감사한 마음으로 조금 더 기다려본다.


경우 2. 그는 애초부터 직원들과 회식을 하고 싶은 것이다. (난이도 ★★★)


구내식당이 이미 문을 닫은 시각 저녁 6시 30분에서 7시. 그가 이 시간까지 나가지 않는다. 그렇다면 "개인적인 약속"이 없을 확률이 높아진다. 당시 119(한 장소에서 1가지 주종으로 9시 전에 자리를 마치는 것) 운동이 유행처럼 퍼졌었는데, 미스터 쿠는 본인이 119를 잘 지킨다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가 7시까지도 퇴근하지 않는다는 건 외부 인사와의 약속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왜 퇴근하지 않는 걸까?"


시간이 조금 더 지나니 그가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슬그머니 일어난다. "응? 너네 밥 안 먹었냐?" (그래. 안 먹었다요.) "아예. 차장님."하고 우리가 우물거리면 "밥이나 먹으러 갈까?" 한다.




경우 3. 그는 집에 가기 싫어서 버티다 보니 배가 고파져서 직원들과 회식을 하고 싶은 것이다. (난이도 ★★★★)


다음 경우로 넘어가 본다. 그렇게 될 경우 7시가 조금 지나 배가 고파진 그는 다음 2가지 중 1가지를 제안한다. 첫 번째, "야 뭐라도 시켜봐라" 두 번째, "야 나가서 뭐라도 먹을래?"


여기에서 첫 번째는 아주 양호한 편에 속한다. 미스터 쿠의 지시를 내가 접수해서 막내에게 눈치를 준다. 나의 눈짓을 접수한 막내는 능숙하게 이곳까지 배달이 가능한 몇 안 되는 음식점들의 메뉴를 미스터 쿠에게 보고한다.


내 경험상 "뭐라도 시켜봐라"에서 미스터 쿠가 진짜 배달 음식을 선택한 경우는 10번 중 1번도 채 되지 않는다. 제발 빨리 배달 음식이라도 먹고 집에 가고 싶은데, 막내의 추천 메뉴들을 쓱 보던 그는 대부분의 경우 큰 확률로 "야, 먹을 거 없다. 그냥 나가서 먹자" 한다.


막내는 허탈하게 우리에게 돌아오고, 파티션 너머로 들려온 미스터 쿠의 목소리를 이미 들은 우리는 회식하러 나갈 준비를 한다.


결국 외식이라 적고 회식, 시간 외 근무, 초과근무라고 읽는 저녁 식사를 하러 간다. 주로 장소는 미스터 쿠의 단골집이다. 유명한 야구선수 누구의 작은 아빠인지 큰아빠인지 하는 분이 하는 식당이란다.


막내는 능숙하게 숟가락과 젓가락, 물 잔을 세팅하고, 나와 후배들은 5명이 먹으면 딱 좋을듯한 양의 안주, 그리고 적당한 주류(예를 들면 소주 1명에 맥주 2병이라던지, 소주잔 1잔에 맥주 5잔이라던지 말이다)를 세팅한다. 그 사이 담배를 맛나게 태운 미스터 쿠가 뒤늦게 들어오면 맛집에 또 와서 아주 행복한 척을 하고 텐션을 급하게 끌어올린다.


술자리를 빨리 끝내는 방법 중 하나는 식사를 빨리 먹어 없애버리는 거다. 우리의 목표는 오직 빨리 집에 가는 것. 고로 빨리 먹어 없애는 거였다.


술배는 크고 밥 배는 작았던 그는 우리가 "차장님 안주 더 시킬까요?" 하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우리는 바로 잔 고르기에 들어가고 막잔을 '짠'하고 시원하게 자리에서 일어난다. (잔 고르기 할 만큼 술이 남아있지 않고 반병 정도 애매하게 남아있으면 낭패니 중간중간 타이밍을 보며 적당히 술을 남겨둬야 한다)




나와 후배들은 일주일에 3번 정도는 이런 패턴으로 경우 2, 3까지 끌려가곤 했다. 자연스레 주 3일을 술을 마시고 귀가하게 되었고, 아무리 한자리에서 9시 전에 마친다고 하더라도 그 시간에 술을 먹어버리면 운동도, 독서도, 산책도 하기 힘들었다. 늦은 밤에 안주에 술까지 먹어야 하니 살은 살대로 찌고 있었다.


그리고 언제 회식을 해야 할지 모르니 개인적인 약속을 잡을 수가 없었고, 약속은 자주 파투 내게 되어 인간관계는 뒤죽박죽이 되어버리는 것 같았다.


한 번은 정말 오랜만에 만나기로 한 친구가 있어서 회식하러 가자는 그에게 "죄송합니다. 차장님 제가 진짜 오랜만에 약속이 있어서요." 하고 겨우 말을 꺼냈다.


그다음 날 나는 그에게 결재를 하나도 받지 못했다.


그 후에는 아예 주중 약속을 잡지 않게 되었다.



경우 4. 그냥 집에도 가기 싫고 밥도 먹기 싫다. (난이도 ★★★★★)


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그렇게 됐네요" 하면 되었던 일들을 나 혼자서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던 것 같다.


평소 눈치를 많이 보는 나는 상사가 자리에 앉아서 푹푹 한숨만 쉬고 있으면 내가 오늘 올린 결재 때문인가 싶고, 오늘 내가 뭘 잘못했나 하는 온갖 생각이 든다.


한 번은 다음날 장거리 출장이 있어 칼퇴근했으면 하는 날이었다. 목요일이었던 그날, 유난히 상사의 한숨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내가 뭘 잘못했었나? 이게 문제였나? 저게 문제였나? 짱구를 아무리 굴리고 후배들과 눈알을 굴려도 원인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경우 그는 11시까지 이유를 말해주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앉아있었다.


그는 자정을 1시간 앞둔 그때서야 자리에서 일어나 외투를 걸치고 집에 갔다.


# 분노의 질주


나는 평소 화를 잘 내지 못한다. 이상하게도 그날은 저녁 11시까지 붙잡혀있다가 나오고 나니 가슴이 유난히 답답하고,울컥했다. 당시 우리가 근무했던 사무실은 댐과 정수장 옆에 딸려있었다. 그 때문에 높은 언덕 위에 있었고, 나는 항상 퇴근길에는 브레이크에 발을 올려놓고 조심스럽게 급경사를 내려왔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 나도 보르게 급경사에서 속도를 줄이지 않고 "부르릉!"하고 내려갔다. 그때 자동차 왼쪽으로 뭔가가 달려와서 내 차에 사정없이 부딪혔다.


나는 너무 놀라서 몇 미터를 더 지나가서야 멈췄다. 뒤이어 차를 가지고 출발하던 후임이 생각나서 전화를 걸었다.


공대 여자 : W 씨. 혹시 고라니 보여요?
후배 : 네. 대리님. 보입니다.
공대 여자 : 어쩌고 있나요?
후배 : 고개를 들고 도로에 앉아있습니다.


어쩌지? 뭐부터 해야 하지? 하고 멍하니 있다가 일단 모든 이의 수호천사 119에 전화를 걸었다.


공대 여자 : 안녕하세요. 119죠?
119 : 네. 맞습니다. 무슨 일이시죠?
공대 여자 : 고라니가 다쳤어요. 고라니 좀 도와주세요. 선생님. 흐윽
119 : 선생님 진정하시고요. 죄송하지만 여기는 사람을 돕는 곳이라서요. 혹시 해당 군청 야생동물 보호센터 이런 곳으로 전화해보시면 어떨까요?


나를 도와준다고 생각하시고 와주시면 참 좋았을 텐데. 하고 생각했다.


공대여자 : 안녕하세요. 군청이죠?
군청 당직자 : 네. 당직실입니다. 무슨 일이시죠?
공대여자 : 고라니 좀 도와주세요. 선생님. 흐윽


그렇게 고라니를 인수인계하고 집으로 올 수 있었다. 고라니가 차에 부딪힌 느낌이 너무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그날은 차가 얼마나 찌그러졌는지 상태를 확인하기도 너무 무서워서 그대로 차를 주차하고 집에 들어갔다.


나는 바로 다음날 내 차로 왕복 6시간 운전을 해야 했다. 본부 여자 차장님 한 분을 모시고 본사에서 볼일을 보고 집으로 출발하기 전 그제야 차장님께 말했다.

공대여자 : 차장님 저 어제 사고 났어요.
여자 차장님 : 응? 어머 왼쪽이 정말 찌그러졌네?
공대여자 : 그런가 봐요. 지금 센서도 이상한 것 같아요. 갑자기 빠이 ~ 거리기도 하고.
여자 차장님 : 그런데도 너 차를 몰고 온 거야? 대단하다. 어머 근데 저 센서에 뭐야? 털이니 설마?


그렇다. 고라니는 내 차의 센서에 털을 담겨놓고 갔다. 그 뒤로 화날 때 과속하는 나쁜 버릇은 완전히 고치게 되었고, 그 뒤로도 퇴사하기 전까지 각종 경우의 수에 해당하는 눈치 야근을 견뎌내야 했다.


* 그 뒤에 고라니를 다치게 했다는 내 말을 들은 미스터 쿠는 "차에 실어 오지. 그 약 되는 걸 두고 오다니." 했다. 입을 때려주고 싶었다.




2019년(고라니 사건 후 5년 뒤)


후배 : 선배 댁에 안 가세요??
공대여자 : 아~ 아직 마무리할 게 있어서요. 먼저 들어가요.
후배 : 아이고, 고생이 많으시네요. (머뭇머뭇)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공대여자 : 네. 내일 봐요.
(공대 여자 속마음 : 진짜 가네? 에헴)


나도 그렇게 별수 없는 젊 꼰대이자 선임이 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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