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 기독교인

안티 기독교인의 무슬림과의 사랑

by Massoud Jun



*** 안티 기독교인의 무슬림과의 사랑



조용하고 고즈넉한 스킥다 근처 항구 마을 엘 마르사(El Marsa)의 아침 공기가 상쾌했다.

정박한 배들이 먼바다로 나갈 만큼 큰 배는 없었지만 조그만 항구는 한국에서 보던 걷과 다를 바 없어 정감이 갔다. 먼바다를 향해 놓인 테트라포트엔 빵을 미끼로 써서 원투 낚시를 하는 젊은 두 명과 학교를 땡땡이쳤는지 꼬맹이 남자아이 셋이 여기저길 오가며 장난을 쳤다.


항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선 그물을 끌어올리는 어선 한 척이 소리도 없이 분주한 그물질을 하는 광경을 바라보며 이스마는 히잡을 벗어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내 어깨 위에 머리를 기댔다.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볼을 어루만지자 가만히 바라보았다. 믿음과 신뢰의 눈빛이 밝게 빛났다.


엘 마르사로 향하는 평원과 지중해.



어릴 때부터 천주교를 믿었던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발길을 뚝 끊었다. 28세 이후, 한국을 떠나 프랑스 외인부대 생활을 하면서, 천주교 국가였던 프랑스의 영향으로 크리스마스가 되면 의무적으로 성당에 가던 때는 그 어떤 종교적인 믿음이 남아 있지 않았고 외인부대에서 만난 이슬람 동료들은 전혀 종교적인 색채를 띠고 있지 않았다. 단지 그들의 생김새와 언행이 친화적이지 않았던 기억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외인부대를 제대하고 파리 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부터, 여행사 가이드를 하고 프랑스 역사와 종교사를 공부하면서부터 오히려 종교를 더 멀리하기까지 했다. 그것은 로마교황청을 다녀오고서 더더욱 확고해졌다. 금빛 찬란한 교황청의 진귀한 보물들과 유명 화가들의 작품들, 종교가 다스렸던 암울했던 중세시대의 몰상식이 종교의 권위 아래 모두 모여 있는 교황청은 성스러운 곳이라기 보다, 화가들과 장인들을 탄압하고 협박하여 만들어 놓은 황금 궁전이라는 느낌만 강했을 뿐!


가난하고 병든 자들의 이웃인 예수의 삶이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했겠거니와 프랑스의 교회가 단지 건축물로서의 역할을 할 뿐, 미사를 드리는 공간으로부터 멀어진 관광지가 된 것도 그랬다. 그런 교회가 한국에 와서 세계 최대의 교회, 제 1의 기독교 국가가 된 이후의 비즈니스의 각축장이 되어, 기독교의 역사를 모르고 소설책인 성경의 내용만을 주구창창 세뇌시켜 권력화, 비리화 된 모습을 보는 것도 그랬다. 초기 교회는 신성했었어도 이승만 이후의 교회는 악마 자체였다. 그런 결론에 다다르자 종교에 대한 혐오감만 생길 뿐이었다.


프랑스의 무슬림들을 어느 정도 구별하게 된 이후부터, 혐오스러운 그들의 언행은 도저히 가까워지기 힘든 부류들로 구분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프랑스 사회에 동화된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북아프리카 무슬림들과 프랑스 현지인들과의 구분은 명백하지 않았지만 오리지널 북아프리카 인들은 금방 언행에서 표시가 났다.


미완성의 만들어진 신 위에 새로 쓰여진 코란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음에도 알제리 무슬림들의 삶은 알라와 일심동체가 된 것처럼, 코란의 언어가 일상화 되어 있었다. 종교에 대한 나의 불신이 그들에 대항하는 것처럼 보여, 설전을 벌일 때에는 오히려, 한국 사회에서 마주친 기독교도들보다 훨씬 편안하고 관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보고 지금까지 아프리카와 파리에서 보아왔던 혐오스러운 북아프리카인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직접 경험하고서는 편견의 무서움도 마음 한편으로는 느꼈다.


그러나, 아시아인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사람들에 대해 공격적이고 모욕적인 언사는 기본이고 남루한 옷이나 체육복을 입고, 덥수룩한 수염을 대부분 기르고 머리엔 젤을 금방 물을 묻힌 것처럼 반짝거릴 정도로 발랐거나 짧은 스포츠머리를 하고 있었다. 그들의 언행을 이해하기 힘든 사람들에겐 영락없는 동네 양아치나 소매치기처럼 보였다. 그들은 프랑스 사회의 주요 골칫거리여서 파리를 찾는 여행객들에게 온갖 혐오감을 줄만한 패악질을 일삼았기 때문에 일말의 좋은 이미지가 없었다.


그리하여 점점 더 이슬람 세계에 깊이 들어갈수록, 나이가 들수록 점잖고 깊이 있는 무슬림이 되고 젊을수록 위험천만하게 분노를 유발했다. 그들의 언어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행하는 욕설과 모욕은 용서를 불허할 정도로 혐오감뿐만 아니라 증오까지 불러일으켰다. 마음에 드는 여자들 뒤를 따라가며 유사 성행위 제스처를 취하기도 했고 관심 없다는 여자들을 따라다니며 줄기차게 전화번호를 묻거나 머리와 어깨, 허리, 엉덩이를 쓰다듬었다.


관광객들을 따라다니면서는 프랑스어를 할 줄 모르는 사람들에게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을 퍼부었다. 그들을 채용해서 일을 시킬 곳은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에 거리의 부랑아가 되거나 프랑스는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알제리를 방문하기 전까지 북아프리카 사람들은 국적 상관없이 내게 혐오스러운 언행을 가진 무슬림들이었다.


메카를 향해 기도하는 일꾼

그러나, 알제리로 와서 동서 고원 고속도로 지질조사 프로젝트에서부터 만났던 현지 알제리인들은 마치 내 고향 사천의 시골 사람들을 보는 것처럼 정감이 갔다. 그들은 드 넓은 사막에서 메카를 향해 기도를 올리고 코란의 말들을 일상처럼 사용하는 사람들이었지만 종교적인 색채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시골의 이웃 같은 사람들뿐이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정을 잃어가는 한국 사회가 가지지 못한 이웃 간의 정을 공동체 의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종교가 그들 삶의 전부가 되고 그것이 전통과 어우러져 구분이 불가능해도 프랑스에서 만났던 마그레브 출신들보다는 훨씬 정겨웠다.


이슬람으로 개종한 사람으로서의 5 계명을 지킨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이스마를 옆에 두고 같이 살게 되면 이슬람에 충실한 그녀에게 만족을 줄 자신은 없었다. 내가 여러 번 사람들에게 하고 다녔던 말처럼, 무슬림 행세를 할 뿐, 무슬림이 아닌 세상 사람들의 생활을 보고 그녀의 생활에 변화가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한국인과 결혼한 알제리 여성들이 대개 한국 문화에 동화되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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