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과 검찰, 그리고 판사
*** 경찰과 검찰, 사법부는 정의가 아니었다.
그리고 한 번은, 역시 부산에서 늦은 시간, 고향 친구와 당구를 치고 나왔는데 문득 가방을 두고 나와 되돌아가서 나오는데 문이 닫혀 있었다. 마침 계단에 밖으로 나오는 문이 있었고 그만한 높이의 담이 있어 다행히 정문 쪽으로 나갈 수 있었다. 담에서 뛰어내리려 할 때, 앞에 경찰관이 한 명 서 있었는데 경찰관에게 얘기해서 당구장 문이 닫혀 있어서 창문 통해 나왔다고 말하고 뛰어내렸는데, 다짜고짜 경찰서로 현행범이라고 연행을 한 것이다. 잘못도 없으니 따라간 경찰서에선 내가 놔두고 왔던 물건, 친구와 당구를 친 사실 등을 확인했고 경찰은 자신이 내가 도둑질하는 걸 현장에서 잡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조그만 파출소 소장은 나의 잘못도 아니고, 경찰관의 거짓말에 대한 사과는커녕 내 친구를 향해,
“저런 친구 뭐 하러 사귀노?”
하고 나무랐다. 스무여덟 해, 한국을 떠나기 전까지 경험했던 한국 경찰의 기억이었다.
서울 노원 경찰서 형사과는 한가했다. 외근을 나간 경찰들을 제외한 몇 명과 내 담당인 형사가 신분을 확인하고 조서를 꾸미기 시작했다. 그의 관등성명을 물어보니 어색했는지 고개를 들어 주변 동료들의 반응을 살폈다. 그의 이름도 모르고 직책도 모른 채, 새파랗게 어린 형사가 내 이름을 꼬박꼬박 부르며 피의자로 대했기 때문에, 업무로써, 단순히 범죄자로 나를 대하는 방식과 일반인을 대하는 방식에서 내 이름을 꼬박꼬박 부르는 게 마땅치 않았다.
김 성한의 욕설이 있은 후에 쌍방 폭행이 있었고 2차 폭행이 있었으니 쌍방으로 고소한다는 내용을 전달했다. 조서는 1시간 넘게 꾸려, 태어나 처음으로 기억된 조서를 꾸미는 방식에서, 법률에 대한 지식이나 경험이 전혀 없었다. 24살 때의 기억은 깔끔하게 잊혀 조서를 꾸몄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지만 그 날의 기억이 선명했던 것과는 달리, 선택적 기억에 의해 과거가 기억나는 게 신기했다. 형사는 조서를 내게 보여주며 정확하게 진술대로 꾸렸는지 확인하며 매 장마다 확인했다는 도장을 찍었다.
조서를 꾸민 날 저녁에, 김 성한은 내게 경찰서 가서 진술을 했고 자신을 때린 건 사실이니 합의를 하자고 종용했다. 그것도 따로 나를 불러내서 형이라고 부르면서 하는 말이었다. 그 교활하고 간사한 눈은, 나를 가소롭고 하찮게 여기는 눈 빛이었고 여전히 도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합의 같은 거 하려면 진단서를 끊어 오라고 말했다. 김 성한이나, 소장이나 한심한 인간들의 한심한 짓거리에 놀아나는 꼴을 보자니 속에서 부글부글 참을 인내를 새겼다. 회사 관리자들은 지하철 본격적인 작업이 들어가기 전에, 폭행에 대한 사과부터 하라는 지시를 내게 했다. 김 성한이 욕설을 하고 일은 하지 않았다는 건 중요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며칠 후, 사용하는 고글의 안경알이 없어졌다는 걸 확인했다. 김 성한 밖에 없었으므로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모른다는 답변에, 소장에게 물어보니 '아이씨, 아이씨' 인간이 낼 수 있는 가장 짜증스러운 소리를 냈다. 이윽고, 그 고글이 없으면 불안해서 일할 수 없으니 그만두겠다고 말하니 소장의 얼굴에 웃음꽃이 폈다. 너무 추했다. 그 날 이후, 며칠 동안 여행을 다니다가 프랑스로 휴가를 떠나 3개월 만에 한국으로 돌아와 검찰청으로부터 100만 원 약식기소라는 벌금을 판결받았다는 문자를 장승포 갯바위에서 낚시를 하다가 받았던 것이다.
폭력이 내 일상일 때가 있었다. 아무 감정 없이 전투를 펼쳐야 하는 외인부대의 특성상, 유럽에서 외인 부대원은 공포의 대상이자 존중의 대상이기도 했다. 유럽이나 외국인에게 외인부대 출신이라 밝히면 모두 존중을 표했을 정도지만 한국에선 상대에 대한 비하와 동경이 반반이었다. 외인부대 제대 후의 프랑스 생활 20년은 그저 평화롭고 자유로운 영혼으로써, 아무 걱정 없던 생활이, 한국에 와서는 아무런 의미 없이 그저 밑에 일하는 졸개처럼 대했기 때문에, 그런 문화적인 차이와 상대 비하가 일상화된 한국에서는 외인 부대원이면 못 배워서 무식하고, 할 일 없어 목숨 걸고 돈 벌려는 용병 취급을 받았다.
또한 복싱 코치 생활은 스포츠였으므로 일상과 연결될 일이 거의 없었다. 내성적인 성격을 바꾸고자 배웠던 복싱 생활은 내 천성을 바꾸어 놓지 못했다. 까불거리고 외향적인 성격으로 보일만한데도 내성적이었으며 운동이 끝나고 나면, 음악과 미술, 시와 문학에 취해 있던 시기였다. 얽매이기 싫어하는 성격이 체육관에서는 나를 '자유인'이라고 불렀지만 비폭력적인 성향은 바뀌기 않았다. 그러므로 폭력적인 생활 속에서도 일상적인 삶은 책과 그림, 음악에 빠져 살았던 별종이었다.
*** 재판
정식 재판을 신청했다.
김 성한의 조서가 어떻게 꾸며졌으며 어떤 거짓말을 했고, 내 조서 또한 쌍방 폭행으로 진행된 흔적 없이 일방적인 폭행으로 몰아갔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철저한 조사가 이뤄졌는지 궁금했지만 현재까진 그러한 의식이 전혀 없이 진행되었다. 기한 내에 정식 재판을 신청할 수 없었다는, 프랑스를 다녀온 자료를 제출하고 얻은 재판에 국선 변호사를 선임해서 서울 북부 지방 법원에서 재판이 열렸다.
재판에서, 국선 변호사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24살 때 있었던, 까마득한 사건을 떠올리며 그때 이후, 한 번도 불미스러운 일이 없었다는 말에 잊혔던 기억이 떠올랐다. 우리나라의 법 체계가 궁금했다. 어떻게 진행되고 어떻게 처리되는지, 또한 한국에 만연했던 이명박근혜 정부, 아니 해방 이후에 일어났던 공권력의 부정의 한 현실을 너무 잘 직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법에 대한 신뢰도가 오히려 불신이 강했다.
판사는 그러나, 재판이 끝나갈 무렵, 마지막 발언 기회를 주었다.
“고향 사천의 조그만 마을에서 너나 할 것 없이 형 동생으로 상부상조하며 살다가, 프랑스 생활 20년 후에 한국 사회에 나와보니, 폭행이 일어난 과정과 같이, 사람이 좋으면 모함하고 짓밟아 존중과 배려가 부족한 불신이 만연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누구든 개인으로써, 가정의 구성원으로서 존중받을 가치가 있으므로 존중하는 마음을 계속 유지해왔습니다.
누구에게도 억울한 일이 없게 하는 법이, 정확한 초등 수사도 이뤄지지 않아 따귀 때린 것을 주먹으로 폭행했다고 올려도 조사가 이뤄지지 않았고, 나이 어린 사람이 나이 많은 사람을 욕해도 되는 것이며, 주변 증언도 이루어지지 않고 부실하게 오로지 폭행했다는 단순함만으로 이렇게 벌금이 떨어지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저는 벌금 100만 원 결정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쌍방에 의한 폭행이 있었습니다. 상대도 '살짝 때렸어요, 살짝'이라고 진술하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주먹으로 쳤다는 얘기도 거짓말입니다. 작업현장에서 기술자로서 솔선수범을 보이지 않고 갑질만 했고, 저를 보고 자기가 프로젝트 매니저로 일할 때 만났던 전무라고 거짓말을 일삼는 자였습니다.
정의는 상식적이고 모두가 공감할 수 있게 공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억울함을 없앨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방적인 진행은 정의가 아니라, 법이 얼마나 허술한가를 보여주는 동의할 수 없는 비상식입니다. 제가 가진 정의에 대한 존중과 법에 대한 엄중함이 정당한 판결을 내려주길 바랍니다”
판사는 주의 깊게 들었고 기록을 하던 서기가 뒤돌아 나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70만 원이 떨어졌고 전 과정을 거치고 싶어 다시 항고하고 대우조선해양에서 수행한 인펙스의 이치스 프로젝트 청소 감독관으로 일하다가 아프리카 가봉으로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