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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ssoud Jun Oct 02. 2019

또 하나의 가족을 대하는 삼성의 태도

삼성중공업 5: 또 하나의 가족을 대하는 삼성의 태도



 가만 생각해보니, 

새롭게 현장에 투입된 사람들은 3개월 간격으로 건강 진단을 받아야 했다. 비용이 7만 원가량이었다. 진단서에 문제가 발생하면 의사 소견서를 받아 적은 돈이라도 지출을 감당해야 했다. 사용하는 침구 류는 개인이 사야 했고 팀장이나 직·반장들은 서로서로 어려운 상황들을 헤쳐 나온 동지들이어서 돈을 조금이라도 더 남기려면 거실을 침실로 사용해야 했다. 그래도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노동부에서 문제 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국이 언제부터 잘 살았다고 감히 침대와 식탁과 의자를 바라는 개돼지라니! 

그래서 누군가가 거실을 침실로 사용하는 것에 대한 불만을 제기하면 ‘마음에 안 들면 집에 가소’ 같은 대답들이라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쏘아붙였다. 그런 고생도 없이, 인간대접받으면서 일하려는 얼빠진 놈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눈초리였다. 문제는 그렇게 끝나지 않았다. 곧장 왕따와 퇴출로 이어졌다. 자신들이 갖춘 복치 체제에 불만 분자에 대한 보복이었다.


 조직의 규율과 팀장의 돈벌이에 방해가 되는 자기 팀 노동자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경계의 대상이었다. 자신들이 고개 숙여야 할 대상은 오로지 물주인 협력업체, 그것도 사장 선까지 가지도 않고 소장 이하, 인맥을 타고 내려오는 충성스럽게 노동자들을 협력업체에 어떤 불이익이 되지 않게 컨트롤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들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오로지, 술 한잔 사주면서 베풀어주는 호의를 고맙게 생각해야지, 감히 불만을 품는 배은망덕한 놈들은 용서할 수 없었다. 그러한 마인드로 살아남은 조선소의 반장이라는 직책이었다. 업무에 있어서는 실수와 실패, 못했다는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그런 시스템에 익숙해지자, 애써 열심히 일을 다녀도 노동 강도와 수고에 비해 돈은 쉽게 모이지 않았다. 웬일인지,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 더더욱 주머니가 얇아지고 씀씀이가 없는데도 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술을 아끼고 주말도 없이 일해도 그랬다. 드디어 드는 생각이 도대체 이 사람들은 어떻게 돈을 모으고 가족들을 부양할까 하는 생각에 경이로운 마음마저 일었다. 


 일요일도 없이 일했다. 

밥 값이라도 아끼고 주말에 한 시간씩 줄여 일찍 퇴근하는 것을 특근이라는 말로 표현하는 게 어불성설이었다. 노동법에 의하면 토요일 근무가 1.5, 일요일은 2.0인데도 급여엔 꼭 같은 일당이 주어졌다. 주말에 일하기 위해서 수요일부터 인원 파악에 들어갔다. 토요일, 일요일을 특근이란 이름으로 한 시간 일찍 마치는 것을 스스로 위안 삼고 서로서로 위로하며 눈물을 머금은 일당을 벌었다. 


 노동부에 건의해볼 요량이었지만, 지금까지의 노동부에 대한 불신이 그곳으로의 발길을 머뭇거리게 했다. 정확한 정보도, 지식도 없이 괜한 것을 물어 비난받거나 무식하다고 손가락질받을 게 두려웠다.

그 또한 상식적인 궁금증이 풀리지 않았다.


같이 일하던 귀염둥이 모하메드가 훌륭한 가족사진을 보내왔다. 한국에서 돈과 함께 좋은 인상을 얻어갔으면 한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친구들은, 협력업체 정 직원(시급)인데도 맨땅에 잘 수 없어 허름한 집에 매트리스를 깔고 잤다. 못 사는 나라라도 침대 생활이 일상인 그들에게 침대를 마련해줄 여건이 되지 않는지, 그들 집을 방문하고 서러움이 일었다. 같이 일하는 그들의 활력 넘치는 젊음은, 이슬람 국가의 무슬림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나에게도 그다지 정감 가는 친구들이 없었지만, 이슬람 율법의 기도문을 아랍어로 외울 정도로 이슬람에 대해 잘 알았다. 이슬람의 역사도 배워 웬만한 무슬림보다 많은 지식으로 논쟁을 펼칠 수도 있었기 때문에, 과하게 장난을 치는 친구들을 제외하곤 몇몇 우즈베키스탄 애들과 죽이 맞았다. 


그들과 함께 일하면서 한국 기술자가 스패너를 던지면서 ‘집에 가! 이 새끼야!’라고 말하는 걸 목격하고 후다닥 내려가 따졌던 적도 있었다. 그도 괜찮은 사람이었지만 더위에 지치고 순간적인 분노에서 나온 행위라면서도 내가 보기엔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은 우즈벡 친구를 ‘그러려면 집에 가!’라는 말에 대한 사과는 하지 않았다. 무슨 권리로 그런 말을 했느냐고 묻자, 일도 안 하고 농땡이를 부린다는 게 이유였다. 그는 즐겁게 웃으며 일했지 농땡이를 부린 적이 없었다. 


 그들 중, 둘과 저녁을 먹기로 하고 고깃집에서 만났다. 그들은 돼지고기는 먹지 않아도 소고기는 할랄(알라에게 제사 지낸) 음식이 아니어도 먹었고 술은 가리지 않았다. 나는 그들의 나이롱 신자로서의 해맑음을, ‘라 일라하 일랄라(알라의 사도는)’ 라고 비아냥거렸다. 그러자 그들이 ‘모하메드로스 룰라(모하메드이다)’ 라고 답했다. 무슬림이 되기 위해 하는 첫 번째 이 말은, 상대가 비 상식적인 행위를 할 때 비꼬는 말로 쓰였고 반드시 저렇게 대답하지 않으면 무슬림이 아니었던 것이다.


“형님, 우리 급여 떼는데 국민연금과 세금은 왜 떼요?”


즐겁게 술을 마시다가 항상 웃는 얼굴의 모하메드가 물었다. 


“너희들이 여기 와서 일하는 것은 국가 간 계약이고, 에이전시 계약이라 협력업체에서 마음대로 못해. 그런데 국민연금은 왜 떼지? 여기 너희들 노무 담당하는 사람들 없어?”

“몰라요. 아무도 얘기 안 해줘요. 그냥 받는 월급만 받아요”

“국민연금은 좀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너희들 한국 사람들과 꼭 같은 시급 받지?”

“네!”

“너희들은 여러 명이니 회사에 물어봐. 너희들 권리니까 반드시 물어봐야 돼.”

“네, 한국 온 지 3년 됐는데, 아직 2년 더 남았어요”

“그럼, 돈 많이 벌었겠네?”

“하하, 네! 집도 샀고 나중에 돌아가면 신발 공장도 지으려구요”

“그래, 축하한다. 한국 와서 고생하는데 그만한 보상은 받아야지. 한국 사람들 어때?”


둘은 서로의 눈을 번갈아 보았다. 괜한 질문을 한 거 같았다. 


“형님은 외인부대에서 아프카니스탄 파병 갔다 왔으면 거기서 사람들도 죽였어요?”

“우린, 선제 공격권이 없고 공격당할 시엔 반격권은 있어. 그렇게 벌어진 전투에 누가 죽었는지는 모르지. 다만 우리의 화력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나는 말을 하다가 멈추었다. 순진하고도 잘 생긴 모하메드의 얼굴이 심각했기 때문이었다. 우즈베키스탄 옆이 아프칸이었고 같은 무슬림 국가였다.


“우린 전쟁 억지와 평화 유지를 위해 파견된 거였어”


 라고 대답해도 말이 되지 않았다. 정규군이 와해된 한 나라의 군인들이 테러 집단에 가입했고 그들이 가진 무기로 다국적 군의 정예부대가 상대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거제도엔 우즈베키스탄 사람들뿐만 아니라 여러 동남아 국가에서 온 다양한 인종들이 조선소 근처와 한국 전체에 취업 비자로 많이 들어와 있었다. 외국인들로만 구성된 파리와 외곽의 구성원들이 프랑스 전역에서 굳을 일로 자국보다는 많은 이득을 누렸지만, 빠듯한 생활을 하는 이웃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프랑스 문화에 익숙해져서 프랑스의 이방인으로 살아가는데 전혀 괴리감이 없던 나에게도, 시내버스를 타고 다니거나 거리를 활보하는 무리의 그들을 볼 때면 염려스러운 눈초리를 보냈다. 


우선, 

그들의 단정하지 못한 옷차림과 건들건들한 모습이 불량스러웠고, 사람들이 주변에 있어도 큰 소리로 개의치 않고 떠드는 모습 때문이었다. 그것보다 더 염려스러운 것은, 그들이 한국에 대해 좋지 않은 인식을 가지고 본국으로 돌아갈까 하는 것이었다. 시내에서 만나는 사람들이야 괜찮았지만 현장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하는 얘기들을 들어보면, 온통 욕지거리에 인간성을 비하하는 표현을 서슴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배운 언어가 내게도 돌아올까 두려웠고 본국으로 가 증오로 남을까 싶은 괜한 생각이었다.


 그래도 그들은 큰돈을 벌어갔다. 모두 젊고 멋진 친구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을 위한 기도 공간과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한국에 와서 한국의 사회 시스템에 동화된 그들 그 무슬림으로 사는데, 본국에서 의무적으로 해주어야 할 기도실은 한국에서는 요원한 일이었다. 아프리카 현장을 다니면서 작업 중에 빠져 기도를 한다고 사라졌다 한참 후에 돌아오는 광경은 신앙인이 아니라, 농땡이 꾼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한국에 왔으면 그 문화를 따르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지면서도 그들에 대한 대인배의 풍모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모두 휴식을 하러 떠난 사이, 현장을 지키는 네팔에서 온 배관사. 그들은 대개 5년 계약으로 와 시급제로 일하기 때문에 우리나라 노동법과 국제법의 보호 대상이다.



그러나, 그들이 한국에 와서 인간성을 상실한 사회를 보고 가는 것이 아닐까 염려되었다. 작업 중엔 그들에게 입에 담을 수 없는 욕과 비난을 일삼는 한국 사람들도 많았지만 항상 끝말은,


"그렇게 일하려면 집에 가!"였다.


 내게 족장은 배우기 어려운 일이었으나 잠깐 할 거란 생각이었으므로 강력한 운동 삼아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인식했다. 그러나, 조만간 알제리로 갈 것이란 확신은 내게 평온을 가져다주었지만 아무것도 확정된 것 없는 암울한 미래가 동시에 도사리고 있었다. 어차피 부양할 가족 없이 혼자이고 무얼 할지 미래가 없었지만 그렇다고 포기하기에도 애매한 나이, 40 대 중반이었다. 그렇다고 희망을 잃고 포기하기엔 나를 설레게 하는 무언가가 삭막하고 정 없는 이 곳 거제도에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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