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 스트라우스가 읽은 느헤미야
구약성경에 있는 [느헤미야] 3장을 읽으며 문뜩 내가 레오 스트라우스(Leo Strauss)였다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가 유대인이면서도 구약성경이 서양정치철학의 일부로 여겨지는 것을 거부하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그의 방법론은 여전히 다양한 텍스트에 대입될 수 있으니 대입해보는 것은 내 마음이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뜬금없이 스트라우스를 엮어내서 그에게는 미안한 마음이다.
느헤미야 3장은 느헤미야를 중심으로 무너졌던 예루살렘 성벽을 다시 재건하는 이야기다. 남유다가 망하고 포로 된 자들이 다시 고향에서 자신들의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는 모습은 아주 드라마틱하고 감동적이다.
그런데 나는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을 보수한 유대 민족의 이야기를 다룬 느헤미야 3장을 보며 이 이야기에는 두 가지 층(level)의 해석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1. 표면적 해석
본 장은 수년간 무너져 있던 예루살렘 성벽이 드디어 재건되는 모습을 생동감 있게 보여준다. 느헤미야라는 리더를 중심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 성벽을 재건하는 모습은 감동 그 자체일 수밖에 없다. 함께 힘을 모은 여러 사람들의 이름이 성경에 직접 거론되는 것은 그들에게도 큰 영예일 것이다. 이 장을 읽는 기독교인이라면 이들과 같이 하나님이 본인의 이름을 기억할 수 있는 일꾼이 되길 바랄 것이다. 이 구절은 곧 유대 민족의 "회복"을 상징하고 동시에 "하나님의 일꾼"에 대한 칭송이 이루어지는 구절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2. 저자의 본래 의도
그런데 중간중간 이상한 표현들이 숨어 있다. 저자는 여러 사람들이 "자기 집 앞 성벽" 혹은 "자기 사는 곳 맞은편"을 보수했다고 설명한다.
(느 3:10) 그 다음은 하루맙의 아들 여다야가 보수했습니다. 그는 자기 집 맞은편에서 일했습니다. 그 다음은 하삽느야의 아들 핫두스가 보수했습니다.
(느 3:23) 그 다음은 베냐민과 핫숩이 자기 집 앞에서 일했습니다. 그 다음은 마아세야의 아들 아사랴가 자기 집 옆을 보수했습니다. 마아세야는 아나냐의 아들입니다.
(느 3:28) 제사장들은 ‘말 문’에서 성벽까지 보수했습니다. 그들은 각기 자기 집 앞 성벽을 보수했습니다.
(느 3:29) 그 다음은 임멜의 아들 사독이 자기 집 맞은편을 보수했습니다. 그 다음은 동문의 문지기인 스가냐의 아들 스마야가 보수했습니다.
(느 3:30) 그 다음은 셀레먀의 아들 하나냐와 살랍의 여섯째 아들 하눈이 다른 쪽 성벽을 보수했습니다. 그 다음은 베레갸의 아들 므술람이 자기 사는 곳 맞은편을 보수했습니다.
왜 저자는 굳이 이들이 일 한 곳이 그들의 집 앞임을 서술해야 했을까?
여기서 나는 레오 스트라우스(Leo Strauss)의 "비전(秘傳)의 글쓰기(Esoteric Writing)"가 생각났다. 비전의 글쓰기란 쉽게 말해 표면적으로는 A라는 해석이 나오지만 깊이 읽고 독해해보았을 때 B라는 글쓴이의 진정한 의도가 담긴 해석이 가능하도록 글을 쓰는 방법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과거 왕정시대에 자유롭게 "모든 인간의 평등"을 주장할 수 없었던 사상가들은 표면적으로는 왕정을 찬양하는 글을 쓰되 자유에 대한 칭송의 의미를 그 글의 "문장과 문장 사이에" 숨겨놓고 오직 "깊은 독서와 사유"를 통해서만 그들이 글 속에 숨겨놓은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있게 한 것이 비전의 글쓰기다. 스트라우스는 마키아벨리를 예로 든다. (Strauss의 Persecution and the Art of Writing (1952) 참조).
스트라우스의 관점에서 본다면
느헤미야의 표면적 의도 A는 여러 사람들이 함께 성벽을 재건하는 아름다운 그림을 보여주는 것이다.
반면 느헤미야의 숨겨진 의도 B는 자기 집 앞에 바로 무너진 성벽을 두고도, 그리고 그 성벽을 재건하는데 도움이 되는 여러 가지 능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느헤미야가 나타날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던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유대인들의 "행동하지 않음(inaction)"과 "수동성(passivity)"을 비판하고 미래의 독자들에게 이러한 삶의 행태를 경고하는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성벽 재건에 필요한 다양한 능력들을 갖추고 그 지역에 살고 있으면서도 느헤미야가 오기 전 까지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던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을 보며, 그리고 적들의 아주 사소한 방해에도 행동을 멈추고 걱정과 근심에 짓눌리는 믿음 약한 그들을 보며, 우리는 아름다운 유대 민족의 회복 스토리 이면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능동적으로 하지 않는 그들을 향한 강한 비판을 숨겨놓은 [느헤미야]를 볼 수 있다. 구약성경의 유대인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을 배반하고 뒤늦게 그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식의 삶의 양식을 보여준다. 그들은 능동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맞게 행동하려 하기보다는 수동적으로 은혜를 받는 삶을 살아간다. 그런 의미에서 [느헤미야] 3장은 떡밥을 제공해야만 그제야 행동하는 유대인들에 대한 느헤미야의, 그리고 하나님의, 비판이 담긴 구절이 아닐까? 성경에 남아있는 그들의 이름이 오히려 글쓴이가 그들을 규탄하며 한 자 한 자 써 내려간 위협의 제스처는 아니었을까?
행동하지 않음과 수동성.
종교를 떠나 모든 인간에게 내려지는 경고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