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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성준 Apr 18. 2018

09 [유학 일상]
취업 준비, 그리고 인생 정리

난생처음 취업을 준비하고 있는 요즘,

이력서와 포트폴리오를 준비하는 과정이 꽤나 행복하다.

주구장창 공부만 해온 인생에 무슨 대단한 이력이 있어서라기 보다는

이력서와 포트폴리오를 통해 지난 10년을 정리하는 행운을 얻게 된 것 같아서.



2009년 여름, 유학을 오느라 또래들보다 6개월 늦게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부터 지금까지 정말 열심히 달려왔다. 근 10년 간 온전히 쉬어 본 경험이라곤 어깨 수술을 위해 2012년 2학기를 반 정도 남기고 휴학했을 때 정도가 전부이니. 외장하드에 저장되어 있는 2009 폴더부터 2018 폴더까지 어느 하나 수업 자료나 연구 자료 등으로 빼곡하지 않은 폴더가 없을 정도로 많은 공부와 활동을 해왔고 쉴 틈이 주어지면 언제나 인턴쉽이나 여행 등의 활동으로 그 시간을 채워왔다.


2009부터 2018까지 폴더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말해주듯 나는 자료 정리를 열심히 하는 편이고 잘 하는 편이다. 그런데 막상 정리는 했지만 이 폴더들을 열어볼 일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그러던 와중에 취업 준비를 위해 이력서와 포트폴리오를 제작하면서 처음으로 지난 9년간 쌓인 자료들을 한눈에 볼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어떤 활동을 해왔고, 어디서 무슨 공부를 했으며, 어떤 사람들과 어떤 프로젝트들을 해왔는지를 쌓아온 자료를 통해 돌아보니 이제는 기억에도 남아 있지 않은 많은 순간들이 나에게 돌아왔다. 내가 2010년에 어디서 인턴을 했었는지, 2011년에 어떤 수업을 들었는지, 2015년에 어디서 학회 발표를 했었는지 등. 단순히 이력을 정리한 것이 아니라 인생을 종이 몇 장에 정리해 보는 과정은 생각보다 굉장히 특별했다. 삐까번쩍한 단어들로 별 것 아닐 수 있는 경험들을 멋지게 포장하고 나니 "내가 이제까지 그냥 허송세월만 보내지는 않았구나" 싶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갭이어 동안 일할 곳을 찾는다는 심정이었기 때문인지 취업 준비에 많은 시간을 쏟는 게 아까웠다. 그래서 대부분 그냥 원서 서류에 정보를 기입하는 수준의 노력만 기울였다. 그런데 점점 욕심이 생기면서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요구하는 곳에 지원하게 되었고 이 과정을 정말 즐기게 해 준 곳은 나와 정말 상관없을 것 같은 디자인 관련 회사였다. 정치철학을 공부해서 디자인 회사라니. 사실 합격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런데 이 과정을 통해 팔자에 없는 포트폴리오를 작성하다 보니 취업과 별개로 아주 세밀하게 스스로를 되돌아볼 수 있었다. 나아가 나와 상당히 거리가 있는 분야의 회사에도 나 자신을 팔아 본 것은 아주 값진 경험이었던 것이다. 내년이면 또 박사를 지원하고 공부에 몰입할 텐데 언제 또 이런 경험을 해볼까 싶기도 하고.









이력서와 포트폴리오 작성은 재미있었다. 그래서 결국 어디로 가게 될까?

전혀 예상할 수가 없다. 요즘 미국 경기가 좋다고들 하던데 그렇다고 철학 공부한 우리들도 취업하기가 쉬울까. 동기들과 서로 장난 반 진담 반으로 1년 동안 읽은 책을 분리수거 회사에 파는 게 우리가 일해서 버는 돈 보다 더 수익이 좋을 거라고 이야기하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기들과의 대화는 항상 "그래도 어딘가는 가서 일하겠지"로 끝난다. 모두가 나름대로 열심히 취업준비를 하고 있을 테니 정말 9월쯤이면 모두 어딘가에는 가 있을 것이라 믿는다. 어딜 가게 되든 진지하게 취업 준비를 해본 경험은 앞으로 공부하는 인생에 엄청나게 큰 자산으로 남을 것 같다. 덤으로 공부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취업 경험이 중요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사회생활도 안 해보고..."로 이어지는 다양한 꼰대 발언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게 되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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