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년간 죽어있었다.
사람이 1년 동안 무덤에 있다가 살아서 나왔다는 얘기는 아닐 테고 도대체 뭔 궤변을 늘어놓으려고 할까 싶겠지.
나는 1년 동안 최소한의 '드러냄'을 선택했다. 오프라인에서도 만남을 최소화했고, 소셜미디어에 사진 한 장, 단어 하나 업로드 하지 않았다. 행동을 멈추고 생각할 시간을 갖고 싶었다. 그 1년은 더 깊이 살아 있음을 느끼는 시간인 동시에 사라지는 존재가 되는 두려움이 공존하는 시간이었다. 떠오르는 생각, 좋은 아이디어, 날카로운 비판, 좋은 곳, 좋은 음식, 놓치고 싶지 않은 순간을 포스팅하고 싶은 충동이 때때로 일었다.
당신은 지금, 바로 내가 쓴 글을 읽기 시작하기 직전까지, 내가 살아있는지 죽어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엄밀히 얘기하면 살아있는지 죽어 있는지 조차 관심이 없었다.
6개월 전쯤 나를 만난 사람에게, 나는 6개월 전에 죽은 사람이고, 2주 전에 만난 사람에게는 2주 전에 죽은 사람이다. 내가 가장 최근까지 살아 있었던 사람은 조금 전에 통화한 나의 가족일 것이다.
당신은 지금 살아있나?
그렇게 믿는 근거는 뭐지?
감히 누가 당신이 이 순간에도 살아있다고 증명해 줄 수 있지?
지금 누군가와 함께 있다면 당신 옆 그가 증명해 줄 것이고 그게 아니라면 당신은 지금 누군가와 미디어를 통해 소통하고 있어야만 한다. 실시간 증명이 어렵다면 하다못해 내가 아닌 누군가가 나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곳, 예를 들면 페이스북, 유튜브, 브런치 따위에 '드러냄'이라는 행위를 하고 있어야만 가장 최근까지 살아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
'꼭 누가 알아줘야만 살아있는 건가?'라고 물을 수 있겠다.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한 삶을 살 자신도 없으면서...
만약 당신이 아무도 없는 방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면 당신은 살아 있는 것인가? 그렇게 1달, 1년, 10년 있어도 당신은 살아 있는 존재인가? '그렇다'라고 대답한다면 질문을 좀 바꿔보자.
당신은 실제로 만난 적이 없는 존재가 있다. 그는 아무도 없는 방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 그렇게 1달, 1년, 10년을 지낸다. 그 사람은 살아있는 존재 인가? "내가 보지 못했을 뿐 살아는 있지!"라고 답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지금 이 질문을 던지기 전까지 당신은 그의 존재조차 알지 못했다. 그는 죽어있었다. 아니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다. 이 질문을 통해 당신에게 그의 존재가 인식된 것이다. 이 질문이 가만히 있던 그를 그의 방밖으로 드러내 버렸으니까. 자의든 타의든 드러내지 않는 모든 존재는 살아있어도 죽어있다.
끝없는 우주에는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무언가가 있겠지.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다면 그 관찰된 적이 없는 '무엇' , 그 무엇인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그 존재는 우리에게 없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명명할 수도 증명할 수도 없고, 그것이 한 개인지 백개인지도 얘기할 수도 없고, 육안으로 보이는 것인지 안 보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상태를 사람들은 무(無), '없음'이라고 한다. 쉽게 얘기해서 있어도 없다고 해야만 하는 상황이다.
아무도 내 존재를 모른다는 것도 좀 그렇고, 방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사는 것도 드문 일이니, 그럼 좀 더 현실적인 얘기를 해보자.
지금처럼 전 세계가 함께 보는 화면에 나를 또는 내가 원하는 무엇을 드러낼 수 있는 시대는 더더욱 '드러냄'의 압박을 받는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이나 소셜 미디어라는 것이 이렇게나 지배적이지 않았던 시절, 사람들은 원하는 무엇을 꽤나 찾아다녀야 하는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너도 나도 내 재능을, 내 삶을, 내 상품을 알아달라고 소리를 지르고 몸부림을 친다. 내가 무엇을 찾는다면 그 기회를 누군가에게 준다면 아우성치는 수많은 사람 중에 눈에 띄는 한 명을 고르면 그뿐이다.
일거수일투족 다 드러내고 알아달라고 몸부림치며 살게 되는 이유는 충분하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런 '드러냄'을 통해 크고 작은 성취를 이뤄내는 것을 수도 없이 본다. 그런데 나만 '나는 자연인이다'로 살 수는 없지 않은가. 혼자 보다는 더 많은 사람을 만나야 하고, 직접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은 온갖 플랫폼을 통해 만나야 한다. 그래야만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고, 성장할 수 있다. 그 범위가 더 클수록 더 많은 부와 인기 또는 명예까지 누릴 확률이 높아지고, 그것을 사람들은 '성공한 삶'이라고 한다.
오프라인의 삶만 사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하자. 본인만 온라인상의 무엇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누구도 그의 존재, 활동, 의견 등을 온라인상으로 옮기지 않는다. 다르게 얘기하면 그의 존재가 드러나는 범위라는 것이 실제로 만나는 가족과 친구, 동료정도 까지라는 뜻이다. 그의 생각과 행동, 나아가 그의 삶의 가치가 크게 인정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을까? 그가 실제로 얼마나 가치 있는 삶을 살았는지는 상관없다. 상황이 바뀌고 누군가가 혹은 그 스스로 그를 더 큰 범위에 '드러내'지 않는 이상, 그와 그의 삶은 기껏해야 가족과 친구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너도 그처럼 살고 싶니?"라는 질문에 "Yes! 그는 내 롤모델이지!"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심지어 그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조차도.
이해를 돕기 위해 개인이 아니라 회사라고 생각하자. 아무런 광고도 하지 않고 잘 될 수 있는 회사가 있을까? 광고는 항상 그(제품, 회사)가 좋은 것이라고 한다, 필요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나(회사)를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을 위해서 이 상품을, 이 방법을 알려준다고 말한다. 이렇게 광고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 회사(사람)는 없다.
내가 얼마나 이 일을 사랑하는지,
내가 얼마나 프로페셔널한지,
내가 얼마나 치열하게 사는지, 얼마나 생각이 깊은지, 얼마나 인간적인지,
내가 얼마나 날카로운 통찰을 가졌는지,
그러나 나는 때로 얼마나 유머러스하고 여유가 있는 사람인지,
우리 커플이 어떻게 사랑하는지,
우리 가족이 어디서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시며 얼마나 행복하게 사는지,
내가 나의 아이들을 얼마나 어떻게 사랑하는지,
물론 시대를 막론하고 나를 가장 잘 팔리게 하는 '드러냄'은 '나는 어떻게 이렇게 부자가 되었나'다.
심지어 내가 얼마나 자기 과시를 꺼리고 겸손한지도 오직 드러낼 때만 가치가 생긴다.
'드러나지 않는 삶의 가치’를 알리고자 한다면 관련된 책을 쓰고 강연을 다니며 성공적인 '드러냄'을 해내야 한다. 그래야만 결국 그 생각을 인정받을 수 있는 딜레마를 절대 피할 수 없다. 모든 것은 더 널리 드러날수록 더 큰 가치를 인정받는다.
드러내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마 자신이 드러내고 사는 정도가 가장 적당한 선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자기의 기준보다 덜 드러내는 것은 용기가 없다거나, 최선을 다 하지 않는다거나, 지혜롭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더 드러내는 것은 천박하고 속 보이는 부끄럽고 좋지 못한 삶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딱 그 정도의 '드러냄'을 선택하는 것이다. 늘 스스로가 올바름의 기준이다.
우리는 어떻게 드러나지 않는 것의 가치 더 나아가서 드러나지 않아야만 하는 것의 가치를 지키면서 또 한편으로는 더 많은 더 넓은 더 부지런한 '드러냄'으로 세상 속에서 스스로의 가치를 인정받을 것인가.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