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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간계 연구소 Dec 18. 2022

인간, 한없이 작고 끝까지 교만한

제1장 ‘드러냄’의 의미

이것은 옳고 그름의 이야기가 아니다.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인식/사고 체계가 너무나 보잘것없다는 것. 때문에 드러나는 결과물 또는 성과가 존재가치에 대한 어떤 증명도 될 수 없음에 대한 이야기다.


인간의 삶에서 ‘드러냄’의 의미는 무엇일까…


흔히 ‘드러냄’을 이야기하면 엄청난 성공을 이룬 사람인 양, 어마어마한 부를 누리는 사람인 양 허세를 부리는 경우를 떠올리기 십상이다. 예를 들면 인스타나 유튜브에서 좋은 차, 좋은 집, 좋은 옷, 좋은 곳을 끊임없이 보여주는 이들. 그들 중에는 진짜 사회적/경제적 성공을 이루고 부를 축적한 사람도 있으리라. 그러나 허세던 진세던 그건 중요하지 않다. 그런 일차원적인 ‘드러냄’을 이야기하고자 함이 아니다.


꼭 그들이 아니어도

세상의 모든 ‘드러냄’의 근본은 같다.


그 바탕에는 나에게 그리고 타인에게 혹은 세상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 ‘나에게 타인이나 세상의 평가는 중요하지 않다. 단지 나를 시험하고 증명하고 성장하고 싶을 뿐’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들 역시 그 기준은 세상의 시선 혹은 외부 - 역사, 교육을 포함하는 - 에 근거한다.


예술가들이 작품을 발표하는 행위, 과학자들의 논문 발표, 매일 글쓰기나 달리기 또는 비즈니스적 성과들을 포스팅하는 행위 등등. 훨씬 고상하고 의미 있어 보이는 모든 ‘드러냄’도 마찬가지다. 근본적으로 흔히 관종이라 불리는 그들의 그것과 완전히 분리될 수 없는 지점이 온다. 부정적 의미가 아닌, 근본적으로 ‘드러냄’과 ‘관찰됨’의 속성을 벗어날 수는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더 사소한 것들, 어떤 집에 살고 어떤 차를 타며 어떤 옷을 입고 어떤 말투를 쓰는지 까지 타인에게 나를 드러내는 모든 행위는 ‘나’가 아니라 ‘나를 위한 정치적 행위’가 되어 버릴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세상과 관계 맺는 모든 ‘드러냄’은 의도가 어떻든 타인에게 관찰되기 위함이며 그들뿐 아니라 드러낸 자 스스로도 그 관찰되어진 반응을 통해 그 의미와 가치를 정하게 된다. 결국 스스로에게 인정받는 방법 역시도 ‘드러냄’과 ‘관찰됨’을 통한 평가 이상을 추구할 수 없는 것이다.


당신은 어떤 옷을 입는 사람인가?


그는 어릴 때부터 남과 같은 걸 죽도록 싫어했다. 맞은편에서 같은 옷이나 신발은 신은 사람이 오면 뒤돌아서 다른 길로 갈 정도였고, 한 때 어디선가 듣고 인생 좌우명 비슷하게 품었던 문장은 ‘내가 남들과 같은 생각을 하면 차라리 나를 죽여라’였다. 보통 이 정도면 옷을 직접 만들어 입거나 누가 봐도 옷을 잘 입거나, 누가 봐도 옷을 특이하게 입거나 할 것 같지만 그는 아주 평범하게 옷을 입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드러나지 않는, 타인은 전혀 알 수 없는 복잡한 면이 존재한다.


아무리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나만의 옷을 직접 만든다고 해도, 혹은 백만 팔로워처럼 옷을 잘 입어도, 아니면 누가 봐도 개같이 막 입어서 튀는 스타일을 추구해도, 모든 ‘드러냄’에는 패턴이 있고 그것은 드러내면 드러낼수록 명확해진다. 그는 단지 어떤 패턴에도 속하고 싶지 않아 ‘드러내지 않음’을 선택했을 뿐, 그는 다른 방식으로 패션이라는 것에 그리고 패션이라는 것이 의미하는 바에 관심이 아주 많은 사람인 것이다.


그러나 그가 세상을 통해 관찰되어질 때 그는 그냥 패션에 관심도 센스도 없는 아저씨일 뿐이다. 진짜 아무 생각 없이 옷을 못 입는 사람이나, 신경을 엄청 쓰지만 센스가 없는 사람이나, 나만의 특별한 데모를 하는 사람이나 모두 동일한 결과물로 관찰될 뿐이다.


당신은 어떤 글을 쓰는 사람인가?


나는 매일 글을 올리는 많은 사람들은 알고 있다. 글을 정말 잘 쓰는 작가도 있고, 수려한 글 솜씨는 아니지만 그날 느낀 자신의 깨달음을 쓰는 이도 있다. 그들이 매일 ‘드러냄’을 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이들이 싸구려 관종도 아니고 온전히 퍼스널 브랜딩 행위만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마 누군가는 때로 세상의 더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고 공감하며, 선한 영향력을 전파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과연 그게 어느 편에 누굴까? 언제, 어떤 동기로 그런 행위를 했을까? 수많은 옵션들은 끊임없이 변화하지만 우리의 시선은 늘 편협하고 순간적이다.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그’의 ‘찰나’의 ‘단면’을 캡처해서 착한 편 vs 나쁜 편, 우리 편 vs 상대편을 구분한다. 인간은 실제/전체를 간파할 능력이 전혀 없다는 점을 간과하며 교만해지기 일쑤다. 그래서 그들은 나와 내 주위의 사람들, 내가 인정한 사람들에 대해서만 좋은 의도, 사려 깊은 진심, 인간애 등등이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그러나 그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도 그의 입장에서 ‘나’다. 그 반대편에서도 늘 같은 일이 일어난다. 모순이고 부조리다.


예를 들면 글을 잘 쓰는 작가에게는 이런 능력이 있다. 그것은 읽는 이로 하여금 ‘이 사람은 내 편이구나!’라는 생각을 갖게 하는 것인데, 어떤 화두에 대해 누구의 편도 들지 않으면서 누구나 내 편을 들어주는 느낌을 주는 대단한 글재주가 있다. 하지만 그 작가의 실존은 어떤 인간도 간파할 수 없다.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 아니다. 그 글은 그에게 진심이었다 해도 타인의 감상은 그의 글을 써내는 방식과 재주에 가장 많은 영향을 받는다.


반대로 자기 생각을 가다듬지 않고 거칠게 감정적인 글을 써대는 사람도 있는데, 그의 글은 자신감이 넘치고 호불호가 분명하다. 그리고 자주 논쟁과 분쟁을 만들어 누군가는 그가 매우 불편한 사람이라 생각하지만 또 누군가에게 멋있는 논객이자 정의의 사도다. 그러나 실제로 그가 어떤 사람인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혹자는 드러나는 것 이면의 무엇을 느낀다고 하지만 그것은 사실보다는 관찰자의 믿음에 더 가깝다. 그가 어떤 사람이건 상관없다. 우리는 말을 잘하는 연사에게, 글을 잘 쓰는 작가에게, 연주를 잘하는 음악가에게, 그림을 잘 그리는 화가에게 감동받는 것이다. 세상에서 ‘잘한다’라는 것은 명확한 기준에 의해 결정된다. 누군가 정말 창의적으로 변화시키는 것 같지만 그것도 그가 기준 변화의 흐름에 있었기 때문이다. 관찰되지 못하고 죽은 창의적 산물들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많다.


3차원 이상의 무엇, 흔히 말하는 고차원적 존재가 분명히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확신할 수 없는 시공에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세상의 기준에서 ‘잘한다’라는 것과 전혀 관계가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인식에 의해 결정되는 것들은 모순되고 부조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라면 왜 당신은 A에게 감동하고 B는 쓰레기 취급을 하는데 나는 A가 쓰레기 같고 B에게 감동하는 일이 일어나겠는가. 사람들이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이 상황을 타계하는 방법은 편을 만들고 서로를 지지하며 우리가 더 고상하고 똑똑하며 훌륭한 안목을 갖고 있다 위로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잘 아는 빛의 정체성이라던가 슈뢰딩어의 고양이와 같다. 입자와 파동이 공존하고 삶과 죽음이 공존하듯 모든 것은 관찰되는 순간 그 본질과 달라진다.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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