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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간계 연구소 Jan 11. 2024

이제 나는 고아(孤兒)다

외로운 아이 

준석 : "인자 내는 고아다."

동수 : "니는.. 어른 아이가.."


준석의 아버지 장례식에서 동수와 준석이의 대화다. - 영화 '친구'-

 

어른이 돼서 나이를 먹고 나도 부모가 되었는데, 더 이상 부모의 도움이 필요한 나이도 아니면서 왜 '고아'가 되었다는 표현을 했을까? 심지어 준석의 아빠는 깡패에 둘이 사이가 좋지도 않았으면서 말이다. 왜 다 큰 어른에게도 부모의 상실은 존재를 흔드는 두려움일까.




부모는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나의 역사를 기억하는 유일한 사람이다. 


어찌 보면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시기에 가장 연약한 존재이었던 나를,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대상, 아이가 엄마의 품에서 나와 하나의 독립체로 태어나는 순간 그 아이는 부모에게 가장 중요한 존재가 된다. 그리고 태어난 아이에게 부모는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존재가 된다. 


인간만큼 나약하게 태어나는 동물도 드물다 할 정도로 아기들은 누군가의 돌봄 없이는 도저히 생명을 유지할 수가 없다. 자신의 몸을 가누고 걷기까지도 1년 정도가 걸리고, 야생에서 본능으로 먹이를 찾고 구분해서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도움이 없이는 생존이 불가능하다. 그렇게 기억도 없이 살게 되는 3년 정도의 시간은 마치 이 세상에서 보낸 시간이라기보다 현실 세계에 나오기 전 미지의 어떤 세상에서 있었던 경험에 가까운 느낌이다.


그러나 부모에게는 다르다. 


매일 젖을 주고 기저귀를 갈고 하루종일 눈을 맞추고 웃고 이뻐하는 시간을 부모는 기억한다. 부모만이 눈치챌 수 있는 말투로 처음으로 엄마를 말했던 순간을 기억하고, 기저귀를 벗자마자 아빠를 행해 '쭉'하고 오줌을 쌌던 날을 기억한다. 처음으로 응원을 받으며 기어가기에 성공했던 날을 기억하고, 수 없이 넘어지고 다치면서 걸음마를 배우던 시간을 기억한다. 처음으로 이유식을 먹고 밥알을 먹었던 날을 기억하고, 처음으로 가방을 메고 어린이집에 가던 때를 기억한다. 내가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나의 신발과 옷과 습관을 기억하고, 그때의 그 웃음과 모습과 사랑스러움을 기억한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부모에게도 모든 장면이 생생한 동영상으로 남을 수는 없다. 결국에는 몇 장의 스틸 컷으로 변하는 기억이겠지만, 적어도 그날 그 시절에 부모는 매일, 매 순간을 소중하게 눈에 담는다. 마치 정말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는 사관처럼 말이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의 가장 중요한 시기. 그러나 아무에게도 기억되지 못할 시간이기에, 그 시간을 기억하기 위해 부모는 노력한다. 머리로는 기억할 수 없는 경험과 감정들이지만 그 아이의 가장 깊숙한 어딘가에 잘 쌓여서 결국 행복한 한 존재로 살아가기를 바라면서...


'부모의 상실'을 겪지 않은 상태에서는 알게 모르게 느끼는 안정감, 온전함 같은 것이 있는 것 같다. 비록 더 이상 부모에게 어떠한 현실적 도움이 필요한 상태가 아니라 하더라도 말이다. 


그건 나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나라는 존재의 역사'를 기억하는 부모가 있어 느끼는 온전함이 아닐까. 부모를 잃는다는 것은 인생의 중요한 첫 챕터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어딘가로 사라져 버리는 두려움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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