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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간계 연구소 Mar 29. 2024

대한민국은 아동학대 국가다

아이의 인권은 없는 나라 

한국은 아직도 어린아이들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 못해 미개하다는 것이다. 사회가 '어린아이' - 갓난아기부터 어린이까지- 를 대하는 태도가 야만적이다 보니 심지어 아이를 키우는 부모조차 자기도 인식하지 못한 채 '아이'에게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희생을 강요하게 된다. 온 나라를 지배하는 '아이'라는 대한 통념 자체가 제대로 서지 못하고 되는대로, 흘러가는 대로 정립이 되었기 때문에 아이들이 그놈의 '효율'과 '성장'이라는 한국의 특수성의 가장 큰 희생양이 돼버린 것이다. 다 큰 어른조차 한 인간으로서 또 개인으로서의 존중을 받지 못하는 것이 대한민국의 강력한 사회적 압박인데 '아이'들은 오죽하겠나.  





아이를 아이로 대하는 것은 본능이 아니다. 마치 성별이나 피부색 또는 신분에 따라 아무렇지도 않게 받던 차별의 역사가 있는 것처럼 '아이'라는 존재는 예전에는 아이로서 취급받기보다 약하기 때문에 마음대로 다뤄도 좋은 존재에 가까웠다. 마치 동물의 세계처럼. 


고대에는 부족에게 도움이 안 될 것 같은 아이들은 그냥 죽였다. 풍습이나 미신에 따라 죽는 아이도 있었고, 갓난아이를 강에 던져 살아남는 강한 아이만 걸러내기도 했으며, 장애가 있거나 몸이 약하면 그냥 죽이기도 했다. 죽이지 않으면 버리거나 파는 경우도 흔히 있는 일이었다. 아이는 인간이라기보다 어른의 성관계 때문에 생긴 그냥 귀찮고 성가신 존재에 가까웠다.


중세에 들어 높은 계급의 자녀들부터 미래의 자원으로의 쓸모를 조금씩 보기 시작했고, 종교적 영향으로 조금 더 보호받을 수 있는 존재가 되었지만 여전히 '작은 어른' 혹은 '못난 어른'정도의 취급이었다. 그때까지도 어른은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어찌어찌 살아남은 존재였지 '존중받는 아이'로 대우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아이와 어른이 다르다는 개념을 갖고 있지도 않았다. 말을 알아듣고 몸을 좀 가눌 수 있으면 그냥 할만한 일을 바로 시키고 써먹는 일에만 집중했다. 여전히 죽이거나 팔거나 하는 일에 죄책감이나 잔인함을 느끼는 시대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 이후로 조금씩 나아지기는 했지만 '유엔 아동 권리 협약'이 불과 1989년 11월 20일 유엔 총회에서 채택이 된 것만 봐도 아동의 권리를 사회적 약자 중 가장 외진 곳에 존재하고 있는 것 같다. 


*유엔아동권리협약은 무엇일까요? 유엔아동권리협약은 1989년 11월 20일 유엔총회에서 채택된 국제적인 인권조약으로 아동의 생존, 보호, 발달, 참여의 권리 등 아동과 관련된 모든 권리를 규정해 놓고 있습니다. 유엔아동권리협약은 아동을 보호의 대상이 아닌 권리의 주체로 인식하였다는 점에서 아동 관련 인권조약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국가의 비준을 받은 국제법이며, 우리나라도 1991년 11월 협약에 가입했습니다.




한국에서는 아이에 대한 책임을 부모만 갖는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시대착오적이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경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생존권, 기초 생활권을 보호해야 하는 책임은 그들의 부모에게만 있나? 신체적 장애를 갖고 있거나 다양한 경우로 사회에서 스스로 삶을 영위하기 어려운 사람들은 책임질 수 있는 사회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선진국'이다. 그러나 한국은 이런 면에서 후진 '후진국'에 머물러 있다. 


유엔아동권리협약 제5조에서는 아동권리협약 이행의 1차적 책임이 국가와 부모에게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1차적 책임은 국가와 부모에게 있지만, 아동권리 실현을 위해서는 국가와 부모를 포함하여 가족, 아동, 교사, 지역사회, 지방정부 등 모든 사회가 그 책임이 있음을 명확히 하고 있다.


모든 성인에게는 아동의 권리를 존중하고 보호해야 하는 책임이 있으며, 아동 역시 권리만 가진 권리 주체자가 아니라 타인의 권리를 존중하고 지켜줘야 하는 의무이행자기도 하다.

 



노 키즈 존 (No Kids Zone)? = 약자를 향한 비인간적인 폭력


요즘에는 그 이슈가 많이 시들해졌지만 한 때 한국에서 노키즈존(No Kids Zone)에 대한 얘기가 대두되었던 적이 있다. 식당이나 카페 등등의 영업장에서 대놓고 아이들을 '출입금지'시키겠다는 것이다. 물론 '손님과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같은 허울 좋은 명목이 있지만 이것은 엄연한 인권 모독 행위다. 


한국에서는 공공시설에도 장애인들을 위한 고려가 전혀 안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사회가 함께 살아갈 방향을 모색하고 국가가 나서서 책임을 다하고 분위기를 주도해도 모자랄 판에, 마치 옛날 아이를 물에 집어던져서 살아남은 아이만 키우는 미개한 사회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독일 같은 경우 아이들이 못 가는 곳은 없다. 


당연히 도박장이나 클럽등 어린이로서 미성년으로서 유해한 환경이라고 여겨지는 곳이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는 것은 당연하지만 '영업장에 또는 남들한테 방해가 되기 때문에' 출입을 금지당하는 경우는 없다. 사실 한국은 굳이 노키즈존을 만들지 않아도 이미 사람들의 시선과 눈치가 노키즈존을 만들기 때문에 부모가 아이를 데리고 갈 곳이 없어진 지 오래다. 


"아.. 왜 쓸데없이 애들 데리고 와서 사람들한테 피해를 주는 거야...' 


그럴듯해 보일 수 있지만 이건 아이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니고 어른들이 아이에게 피해를 주는 상황이라는 것을 명백히 할 필요가 있다. 


"장애인이 왜 굳이 휠체어를 타고 기어 나와서 사람들한테 피해를 주나."

"애기 띠를 좀 하지 왜 유모차를 끌고 남들한테 피해를 줘!." 


한국에서 음식점이나 가게에 유모차 동반하면 죄인이 되는 분위기다. 그래서 가능하면 주로 아기띠를 매는데 특히나 더운 여름에 부모가 왜 그 짓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주로 가족단위로 이용하는 몇몇 가게들을 제외하면 테이블 사이에 유모차 통과 못하는 곳도 다반사고 직원 손님들 다 안 반기는 분위기에 심지어 직원이 경험이 없어서 우왕좌왕 당황하기도 한다. '아이들이 뛰어다니고 위험해서''남들에게 피해를 줘서'라는 것이 허울 좋은 핑계라는 것은 유모차에 가만히 누워있는 아이조차 환영받지 못하는 사회적 분위기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대놓고 나는 애새끼는 안 받는다(노 키즈존)라고 말할 수 있는 사회는 몇 백 년 전이나 있을만한 잔인한 폭력이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키즈카페나 어린아이가 있는 가족을 위한 시설들을 따로 만들게 되고 아이를 동반한 사람들은 무슨 한센병환자 소록도에 몰아넣듯이 정해진 바운더리 안에서 생활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그런 한국의 모습은 부모들에게 조차 익숙해진 듯하다. 


애 있으면 차 있어야 하고, 그 차를 타고 비싼 키즈카페 같은 곳을 찾아가야 하고... 애는 짐이고 돈덩이가 되어버린다. 상황이 이러니 지자체에서 몇 십만 원 준다고 출산율이 올라갈 리가 없다. 




독일은 '아이는 아이답게 자라기 위해 보호받아야 한다'는 것에 전반적 사회적 동의가 이루어진 나라다. 대중교통을 포함한 일반인들이 갈 수 있는 모든 시설에 유모차나 아이를 동반하는 것이 가능하고 그 때문에 눈치를 봐야 하는 일은 전혀 없다. 일례로 레스토랑에서 아장아장 걷는 꼬마 아이가 식당 이 테이블 저 테이블을 기웃거리며 돌아다니면 다들 웃어주고 장난쳐주고 이뻐해 준다. 물론 식당이나 카페의 상황이 너무 복잡하거나 위험한 경우에는 좀 다를 수 있지만, 아이에게 어른처럼 자기 자리에 딱 앉아서 조용히 식사를 하는 것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아직 말도 통하지 않는 6-7세 미만의 아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아이는 원래 유난히 호기심이 많고 에너지가 넘치는 것이 당연하고 그것을 굳이 억눌러서 '작은 어른'처럼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 


한국에서 아직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아이를 안절부절 달래는 부모에게 "아 애 좀 어떻게 해봐요!!"라며 소리치는 경우를 종종 봤다. 독일은 이런 상황이면 보통 다들 그냥 아무 일도 없는 듯 자기 할 일을 하거나, 장난감이나 먹을 것을 직접 갖고 와 부모에게 "이런 게 도움이 될까요?" 라며 묻기도 한다. 아직 말도 못 알아듣는 아기에게 까지 어른의 기준을 들이대지 않는다. 아주 갓난아이가 아니어도 마찬가지다. 취학 전 아동이 지키는 선이라는 것은 어른의 기준과 다르다. 만일 말귀를 알아듣고 공공 예절을 이해할 만한 나이의 어린이들의 행동이 좀 심하다 싶으면 아이들에게 직접 얘기하고, 그 아이들 입장에서도 나름의 이유가 있으면 대꾸를 한다. 너무 자연스러운 상황이다. 적어도 지금까지 아이가 남들에게 피해를 준다고 어른들끼리 싸우거나 하는 일을 본 적은 없다. 




독일은 대부분의 상황에서 아이의 마음이나 상태를 먼저 배려한다. 


왜냐하면 그 아이들이 커서 그런 어른이 되어야 좋은 사회가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실 아이와 어른을 대하는 태도라기보다 사회적 약자와 더불어 사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다. 만일 '한 인간'을 일을 더디게 만들고 사람들의 편의를 저해하는 장애물로 취급하는 순간 '차별''인권유린'이 시작된다. 자신을 기대려 주거나 배려하지 않는 사회에서 자라난 아이가 어른이 되면 남들을 배려하고, 기다려주고, 더불어 사는 인간이 될 수 있을까? 아마 또 똑같이 자신이나 남에게 여유 없고 윽박지르며 최대한 빨리 앞으로만 가려는 어른이 될 것이다. 독일은 어쩌면 잔인한 차별과 인권 유린을 '나치'를 경험했기 때문에 그런 부분에서 더 민감해진 것이 아닐까 생각도 든다. 



 

코로나가 한창일 때 검사소 풍경


으로 독일과 한국의 아이를 대하는 인식의 차이를 대변할 수 있을 것 같다. 


독일에서는 사람들이 몇 백 명씩 줄을 서 있어도 우는 아이를 윽박지르는 일은 없었다. 무서워하면 기다려주고 달래주고 얘기해 주고 시간을 충분히 준다. 코를 깊게 쑤시는 대신에 목을 통해 검사하기 했다. 코를 잘못 쑤시면 아이들의 건강에 해가 될 수도 있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일단 국가 자체에서 아이들을 위한 검사 방법에 대해 따로 생각한 것도 없이 어른의 기준을 적용했다. 검사소에서 애들이 겁을 먹고 시간을 조금이라도 지체하면 검사하는 사람들이 시간 걸린다고 생 지랄을 하고, 뒤에 줄 서있는 사람도 난리를 친다. 무서워서 우는 아이 앞에서 시간타령, 효율 타령을 하는 것이다. 심지어 부모도 가뜩이나 겁먹은 아이의 팔을 붙잡고 힘으로 억압한다. 그렇게 힘을 합쳐서 아이의 코를 쑤시고 애가 아프다고 좀 늦게 나가면 빨리 나가라고 또 난리가 난다. 심지어 어떤 아이가 무섭다고 떼쓰니까 아빠가 자기 자식 싸대기를 때렸다던데... 아마 이 상황에 놓인 모든 사람들이 "아이가 우리에게 피해를 주고 있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상황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이건 거의 사회의 가스라이팅이다. 이 상황은 사회가 힘없는, 그리고 인간을 어떻게 존중해야 하는 지를 아직 배워야 하는, 아이에게 폭력을 가하고 가르치는 상황이다.   




이건 사실 검사소 분위기가 아니라 한국 사회 전반의 분위기다. '일처리를 방해하면 어린 아이고 뭐고 다 상관없구나. 인간의 감정이고 뭐고 다 필요 없고 윽박지르고 화내서 일을 처리하는 거구나. 나도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 돼야지!' 아이들은 이렇게 자라서 피해자와 가해자가 뒤바뀌어도 모르는 사회를 또 만들고. 그렇게 악순환은 반복될 것이다.


한국이 경쟁과 효율을 넘어서 더 여유 있고 정이 있는 상황이 되려면,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 '아이들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 아이들이 뭘 모른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가만히 누워서 옹알이나 하는 줄 알지만 목소리를 기억하고 말을 배우고 기고 걷는 것을 배운다. 그렇게 배운 것들이 갑자기 밖으로 표현될 때 어른들은 경이로움에 놀라기도 한다. 이런 건 누가 회초리 들고 때려서 가르친 것이 아니다. 그냥 흡수하는 것이다. 아이들은 어른들은 상상할 수 없는 작고 미세한 감정까지 느끼고 잡아내서 배우는 존재다. 그들을 어른의 생각대로 어른의 기준대로 통제하는 사회는 미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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