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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간계 연구소 Mar 21. 2024

독일 사람들이 타고난 대로 사는 이유

복지와 자유라는 양날의 검

다들 부푼 꿈을 안고 유학을 나온다. 독일이라는 나라에서 선진화된 교육을 받으면서 내 인생을 업그레이드해 보려 단단히 각오들을 하고 독일행 비행기에 오른다. 누군가는 클래식 음대에 입학하여 최고연주자 과정까지 마치고 교수가 되리라 생각하고, 누군가는 공대에 들어가서 연구자, 개발자, 과학자가 되어 저명한 학술지에 논물을 기재하는 상상도 해본다. 심지어 누군가는 백남준처럼 미친 퍼포먼스로 경찰서도 좀 들락날락하면서 역사에 남을 예술가가 되고 싶어 하기도 한다.


그러나 유학초기 핸드폰 개통, 집 구하기, 비자신청, 어학원등록 뭐 이런 류의 폭풍 같은 기본 다지기가 끝나고 ‘진짜생활’이라는 것이 시작되면 소위 말하는 ‘현타’라는 것이 온다. 그야말로 ‘현실 자각 타임’.


학업이나 활동을 하기 위해 독일에 온 건지, 살림을 하고 생존을 위한 필수 행위를 위해 독일에 온 건지 혼란스러워지는 것이다. 마치 생존을 위한 일상이 95%를 차지하고 틈나는 자투리 시간 5%만 나의 꿈을 위해 쓰는 느낌. 5%도 많다. 한 2%?. 한국에서 자취를 하거나 경제적 독립을 해보지 않고 나온 경우에는 그 현타가 더 심하게 오기도 한다.


물론 한국에서는 “너는 딴생각하지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해!”라는 문화 때문에 어렸을 때 집안일을 하거나 생활비나 용돈을 직접 버는 일을 많이 못 해보는 것이 이유이기도 하고, 잘 안 되는 독일어나 입시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 영향을 미치기도 하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독일은 계획대로 되는 일이 없다.



한국사람 기준이면 더더욱 그렇다. 일처리 과정이 매우 느리거나 복잡하고, 그 일을 빠릿빠릿하게 할 만한 사람도 만나기 힘들다.


독일의 관공서


한국처럼 동사무소에 가서 거주지 등록을 한다거나 서류를 발급받기 위해, 외국인청에 가서 비자를 신청하거나 연장하기 위해, 지역 세금 관청에 세금 관련 업무를 보기 위해, 길게는 몇 개월 전에 예약을 잡아야 하고, 때로는 발이 얼어붙는 겨울 새벽 3시부터 줄을 서서 기다리기도 해야 했다. 예약을 잡고 가도 한두 시간 혹은 더 길게 기다려야 차례가 오기도 한다.


문제는 그 이후에 일처리조차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공무원이 독수리 타법으로 아슬아슬하게 내 서류를 작성하는 것을 모니터 너머에서 바라보는 일은 불안하기 짝이 없다. 실제로 이름, 주소, 심지어 성별이 잘못 작성되기도 한다. 마지막에 틀린 거 없는지 확인하라고 보여줄 때 한국에서 처럼 대충 보고 “네, 맞아요 “라고 했다가 속된 말로 독박을 쓸 일이 생기니 조심해야 한다.


‘타자가 느리거나 실수를 좀 할 수도 있지!’라고 생각한다면 오판이다. 관련 법률 역시 본인이 직접 알아보고 필요하다면 프린트하거나 보여줄 수 있게 준비하는 것이 좋다. 한국에서 어렵게 공무원이 되어 철저하게 교육받은 모습을 생각하면 안 된다.


혼인신고 서류를 책상구석에 두고 몇 개월간 출산휴가를 간 사람 때문에 법원과 관청을 직접 오가면서 일처리를 한 신랑도 있고, “너네는 영주권 신청 안돼!”라며 단호하게 대답한 공무원에게 관련 법률을 보여주면서 따지고 그 자리에서 영주권 심사에 통과한 경우도 있다. 문제는 이런 일들이 특별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일이 일사천리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특별한 것이라데에 있다.


오히려 코로나 덕분에 인터넷을 통한 일처리가 조금 더 좋아져서 예전보다는 덜 고생을 하는 것도 같지만 여전히 관공서는 상대하기 싫은 곳이다.


독일의 우체국/택배


우체국이나 택배회사의 배달사고는 흔한 일이다. 분명히 나한테 ‘배달완료’라고 하는데 물건은 온 데 간 데 없고, 분명 하루종일 집에서 기다렸는데, 초인종은 누르지도 않고 ‘수취자 없음’으로 차로 10분 거리에 물건을 맡겨 놓기도 한다. 물건이 크고 무거우면 그걸 어떻게 직접 찾아가라는 건지 난감할 때가 많다. 그렇게 힘들게 찾아온 물건이 망가져 있어서 반품을 할 때는 내가 직접 포장해서 다시 차를 타고 우체국이나 관련일을 하는 가게(Depot)에 가야 한다.


좀 오래전 이기는 하지만 A 씨의 경우, 인터넷을 통해 주문한 옷장이 8주 만에 배달이 왔고 뜯어보니 거울이 깨져있었다. 결국 회사와 실랑이 끝에 그 문짝하나를 또 몇 주만에 배송받은 해프닝도 흔한 일이었다.


사실 ‘아마존(amazon)’이라는 초대형 글로벌 기업이 독일에 진출한 이후 택배업계의 상황은 몰라보게 좋아졌다. 하루 만에 물건을 받고, 반품도 쉬워지고, 심지어 어떤 면에서는 한국보다 나은 부분까지 생겼다. 물론 베를린이라는 대도시의 장점일 수도 있겠으나 예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다.


독일의 통신/전기/수도/은행 등의 대기업


‘대기업이니까 알아서 잘하겠지…’라고 넋 놓고 있다가는 엄청난 손해를 볼 수 있다. 이전에는 한 달 20유로짜리 핸드폰 요금이 통장에서 못 빠져나가자 바로 붙은 연체료가 20유로였던 충격적인 일도 있었다. 아마 지금은 법적으로 무리한 연체료에 대한 규제가 생겨서 덜 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 기본소비제에 관련된 대기업들은 때로는 실수로 과도한 요금을 청구하기도 하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요금제가 달라져 있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회사와 싸워야 하는데 전화만 하면 딱딱 연결이 돼서 “고객님 죄송합니다”라고 말하는 응대를 기대하면 안 된다. 전화와 이메일 그리고 내가 맞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예전 청구서와 자료들을 보내서 겨우겨우 내 소중한 몇 유로를 돌려받아야 할 때도 있다.




나열하자면 끝도 없다. 그냥 거의 모든 생활면에서 순조로운 일이 없다. 기본적인 생활을 유지하지 위해 들여야 하는 시간과 노력과 스트레스가 너무 많다.


자신의 삶을 업그레이드하려면 그 스트레스는 더더욱 늘어난다. 겨우 익숙해진 패턴에서 벗어나면 세금이나 보험 같은 내용들이 또 더 복잡해지고 다시 또 그것에 적응하기까지 너무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에 더불어 제정적인 손해가 오기도 한다.


상황이 이러다 보니 사회적 계급은 더 단단해지고 내가 타고난 클래스를 벗어나기가 더 어려워진다. 무슨 일은 한번 보려면 들여야 하는 시간과 노력이 너무 많이 필요하고 또 그 일이 꼬이면 그 꼬인 것을 풀기 위해 너무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써야 한다. 그러니 모든 힘을 쏟아서 타고난 인생이 아닌 좀 더 내 마음에 드는 ‘다른 인생’을 만들 마음이 사라진다.


자신의 회사에 관련부서가 있거나 이런 잡무들을 대신 처리할 누군가가 있는 정도의 삶을 사는 사람과 본인이 매일 관청이나 기업과 싸우고 수리기사를 기다리고 그 수리기사가 잘못 고쳐놓은 물건 때문에 또 싸우고.. 하면서 사는 사람이 하루에 온전히 ‘자기 발전’에 쓸 수 있는 시간과 에너지의 차이는 엄청나다.




독일은 온통 비효율 천지다.


‘비효율’이라는 것은 좋은 말로 ‘여유’라고 할 수도 ‘자유’라고 할 수도 있는 부분을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이미 권력을 가진 자들에겐 타고난 자신의 인생이나 사회적 계급을 더 완고하게 만드는 강력한 무기이기도 하다.


사실 독일이라는 사회가 복지 좋고, 개인의 자유를 인정하고 자신의 삶에 만족하는 것 같은 모습이 보이는 것은 어쩌면 영화 '설국열차'의 뒷칸에서 앞칸의 삶을 보지 못하게 하는 시스템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영화 '메트릭스'에서 모피어스가 네오에게 파란약(BluePill)과 빨간약(RedpPill)을 내미는 장면에서 처럼 모두에게 파란 약을 주는 사회인지도 모르겠다.


파란약을 먹으면 진실을 보는 눈을 가려 '내가 노예라는 진실'을 보지 못하게 되고, 빨간약을 먹으면 끝까지 시스템과 싸우는 운명에 처한다는 사실. 당신은 어떤 약을 선택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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