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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간계 연구소 Feb 11. 2020

설레발

치려면 끝까지 

'설레발'의 어원은 우리가 흔히 '돈벌레'라고 하는 '설레발이'라는 절지동물에서 왔는데, 이 놈은 작은 몸집에 다리가 30개 정도나 달려서 그 움직이는 모습이 영 부산스럽다. 국어사전에는 '몹시 서두르며 부산하게 구는 행동'이라 정의되어 있다. 


어릴 때 설레발치는 애들이 엄청 꼴 보기 싫었다. 남들 다 아는 거를 지만 아는 냥 잘난척하고, 감투 쓰기를 좋아한다. 뭐라도 작은 거 하나를 해내면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는 게 영 거슬렸다. 나대는 놈들. 


근데 조금 나이가 들고 보니 설레발이 다르게 보인다. 


일단 어떤 분야에서 초기에 혹은 어릴 때 '기회'라는 게 오는 과정을 보자.


여기 그래픽 디자이너를 꿈꾸는 두 학생이 있다. A는 진지하고 완벽을 추구하는 듯하다. 늘 스스로가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사람들에게도 겸손하게 행동한다. 그는 습작들이 영 맘에 들지 않아 중간에 덮어두거나 끊임없는 수정에 수정을 거듭한다. 대강 완성됐다는 것들도 성에 차지 않아 공개하지는 않는다. B는 어딘가 가볍고 나대는 캐릭터다. 항상 자기는 디자이너라고 떠벌리고 교실에서 맨날 뭘 꺼내서 작업한다고 난리다. 디자인이 하나 나오면 드디어 비밀을 알아냈다고 설레발이 말이 아니다. 아무도 알지 못하지만 사실 자질과 실력 모두 A 좀 낫다. 


하지만 C가 같은 반 학생이고 지금 당장 디자인이 필요하다면 당연히 B를 선택할 것이다. C는 A가 어딘가 진중해 보이기는 하나 그의 작업물을 제대로 본 적이 없고, 그는 아직 멀었다는 말을 달고 산다. B의 작품이 썩 맘에 드는 것은 아니나 일단 많은 결과물들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고, 넌지시 운을 띄우니 죽이는 디자인이 나올꺼란다. 그렇게 B는 기회라는 것을 얻었다. 


B는 아직 부족했지만 C에게 자신의 말을 증명해 보이려 노력했고 그렇게 그는 한 단계 '성장'했다. 


이제 100이면 100 디자이너가 필요하다면 두 학생 중에 B를 찾을 것이다. 앞에 언급한 이유에 덧붙여 B는 이제 프로필이라는 것이 생겼고 이미 프로젝트 경험이 있는 사람이다. 두말할 나위 없이 다시 오는 기회도 B의 것이다. 


아무도 모르지만 아직도 A가 B보다 낫다. 그리고 A는 B가 설레발쳐서 비즈니스나 하는 놈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B는 기회가 만드는 더 좋은 기회들을 얻었고, 더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으며 그렇게 성장했다. 그 과정 어디까지는 현실보다 설레발이 앞선 사람이었을지 모르나 지금 그의 설레발은 현실이 되었다. 설레발치던 학생은 온데간데없고, 어느새 발란스를 찾은 그에게 심지어 대가의 냄새가 난다. 


물론 B가 '설레발'만 쳤다면 그런 기회와 성장은 없었을 것이다. 


지치고 힘들어서 자신의 한계가 의심될 때, 남들이 나를 비웃을 때도 설레발 칠 수 있는 것. 


그것은 '용기'다.





이미지 : https://pixabay.com/ko/photos/겨울의-오지-skiiing-2068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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