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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간계 연구소 Jun 15. 2020

타인(他我)의 세계

우리는 모두 각자의 세계를 산다.

'자아(自我)'와'타아(他我)'를 평가하는 이중잣대.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관대한 만큼 타인에게 관대할 수 없다. 그것을 불가피하게 만드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분절되지 않는 시간의 연속성과 함께 관찰되는 유일한 대상은 '나'뿐이다.


인간은 하루에 수 만 가지 생각들을 하고, 수많은 감정의 변화를 갖는다. 물을 사러 잠시 들른 가게 주인의 친절한 한마디에 긍정의 에너지가 샘솟다가, 몇 걸음 앞 아저씨 침 뱉는 소리에 기분을 잡친다. 버스를 타고 목적지까지 가며 머릿속에는 책 몇 권쯤 쓰고 남을 이야기가 흐른다. 그러다가 인생의 큰 결단이나 변화들이 찾아오는 찰나의 순간을 맞이하기도 한다. 그러나 복잡하고 유기적인 흐름들을 읽고, 조합하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오롯이 '나'뿐이다.


'타인'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설사 나와 아주 많은 시간과 감정들을 공유하는 대상이라 할지라도 간간히 '그'가 선택하고 필터링해서 내보내는 아주 작은 신호만을 감지해서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판단할 뿐이다.


방향성도 없이 끊임없이 움직이는 스스로의 내면을 관찰한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그'를 보고 있다고 착각하지만 자아는 타아의 떨구어진 점(點)을 제 멋대로 이어 붙여 이야기를 만들 뿐이다.  


이런 시간의 연속성과 분절성이 만드는 어마어마한 간극으로 내 생각, 판단, 가치관등이 A에서 Z로 옮겨가는 것은 너무 타당한 일이 되고, 타인의 A가 C로 변해버린 것은 변덕, 변절, 우유부단 따위가 되는 것이다.



둘째, 자아(自我)는 전지적 시점에서 바라보는 영화 그 자체, 타아(他我)는 1인칭 주인공 시점에서 바라본 조연 또는 단역 캐릭터다.


한 명의 인간은 하나의 육체를 갖고 있지만 혹은 하나의 육체를 갖고 있다고 믿는 인식 체계 속에 살고 있지만, 한 인간은 무한히 다양한 캐릭터를 하나의 몸속에 갖고 있는 존재로 보는 것이 맞다. 외부 세계에 드러나는 소위 '페르소나(Persona)'는 빙산의 일각일 뿐 의식과 무의식 속에 존재하는 수많은 자아는 극(極)에서 극(極)으로 닿는 스펙트럼을 갖는다. 사회 정의를 외치는 행동하는 지식인이 변태 성욕자적 욕망을 갖고 있거나, 둘도 없는 개차반으로 사는 그놈이 노점상 할머니의 미나리를 10배의 가격으로 사더라도 이상할 것이 하나 없으며 그 중간 어디쯤에 있는 상충하는 모습들 역시 공존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중 어느 것이 진짜 자아도 아니고 어느 한쪽이 가식이라 말할 수 없다. 오로지 문제가 된다면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못하는 방식으로 '자아'가 발현되는 것뿐이다. 나는 이것이 인간이 이야기를 좋아하고 예술과 판타지를 찾는 이유이자, 각자의 삶 자체가 가장 위대한 예술작품인 이유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타아(他我)는 내가 경험한 유일한 캐릭터로만 존재한다. '그'가 '나'를 대할 때 보여주는 '페르소나(Persona)'를 볼뿐이다. 가까이 오랜 시간을 두고 지낸 관계인 탓에 '그'의 조금 다양한 '페르소나'를 본다 해도 내가 가진 틀 안에서 필요한 만큼 최대한 단순하게 '그'가 어떤 사람인지 정의한다. 착한지 나쁜지, 불같은지 온유한지, 필요한지 불필요한지. 내면에서는 새로운 자아가 무한대로 생성되어 끝없이 영화를 찍어대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는 내가 정의한 '그' 역할이어야만 한다.


'내가 사는 세상과 그가 사는 세상은 단지 작은 접점을 갖고 있지만, 결국 우리는 모두 다른 시간과 공간을 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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