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인간계 연구소 Mar 11. 2021

나는 무조건 서울대 경영학과 갈 거야!

제 2 화


어릴 적 제대로 사랑받지 못해 삐뚤어진 사랑에 집착하거나, 인정받지 못해 감투에 집착한다거나, 철학의 부재에서 오는 삶의 공허함을 부와 명예로 채우려 하면 끝없는 수렁에서 허우적거리게 된다.


근데 이거 모르는 사람이 있나? 이 상식에 가까운 사실을 몰라서 허우적거리며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하면 나는 없다고 생각한다. 누구는 깨달음을 얻어 순수하고 고결해 보이는 내적 동기를 갖고 살고 누구는 속물 중에 속물이라 사회적 성공을 위해 달리는 것이 아니다. 삶의 모든 것이 그렇게 무 자르듯이 반듯하게 구분되는 것이라면 이렇게까지 고단하게 살 이유도 없으리라.


삶이 그렇듯 나도 그렇다. 그리고 나는 그 사실을 몰랐거나 인정하고 싶지 않았거나 아니면 무서워서 피했을지도 모른다.


나도 인정받고 싶고, 부자가 되고 싶고, 존경받고 싶은 욕망이 있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


나의 10대 20대를 관통한 가치는 정의(正義)와 진리(眞理)였다. 학창 시절 우리 가족은 9시 뉴스를 보며 함께 저녁식사를 했는데, 사건이 나오는 족족 나는 분노했고 부모님은 그런 아들이 걱정이 됐는지 좀 더 중립적인 입장을 얘기했던 것 같다. 집에서 학교에서 나는 그렇게 세상일에 열 올리며 싸웠다. 그리고 그것은 아직도 나에게 중요한 가치임은 분명하다. 무엇을 하든지 정의로운 방법으로 그 안에 숨겨진 진리를 찾는 것은 중요하다.  


그렇다고 무조건 부자가 되기 위해 죽어라 사회적 목표를 쫓는 그 친구와 정의와 진리를 중요시하는 나는 아예 다른 사람인가? 일말의 교집합도 없이 다른 세상에서 다른 것을 추구하면 사는 존재인가? 절대 아니다. 우리는 분명 교집합을 갖는 극히 평범한 사람들이다. 어쩌면 49:51의 차이가 흑과 백의 차이로 보일지 모른다. 아니, 심지어 말이나 글은 그가 가진 1%를 그의 전부로 만들어버리는 힘이 있다.


그렇게 나는 나의 사회적 욕망을 인정하기로 했다. 내로라하는 자리에 오르거나 슈퍼카를 모아 둔 저택 비슷한 것도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는 걸 보면 결핍에서 오는 강력한 동기부여 따위는 없다 해도 사회적 욕망이라는 것은 내 안에 분명히 자리하고 있다.


그럼 자신의 사회적 욕망을 인정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글을 쓰고 더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인터넷에 올리는 것,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밖으로 꺼내고 또는 일의 결과물을 홍보하고 보여주는 것. 이 행위에는 이유와 정도의 차이를 불문하고 무조건 담긴 메세지가 있다.  


'여기 내가 있어. 칭찬해주고 사랑해줘. 혼내주거나 욕해줘도 좋아. 뭐라도 좋으니 단지 나를 좀 봐줘.


속세를 떠난 도인처럼 사는 특이한 삶을 보여주던, 따뜻하고 사랑이 넘치는 세상을 위해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라도, 더 정의로운 세상을 위해 분노하거나 날카로운 분석을 하던, 자신이 믿는 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하는 일이라 말해도, 아무도 피해 갈 수 없다. 첩첩산중에서 동물처럼 살지 않는 이상 우리는 모두 '나'라는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사회 속에서 끊임없이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존재로서의 나, 사실은 세상과 100% 구분된 '나'라는 것은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가 있다. 내 안의 사회적 욕망을 인정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아이러니하게도 다시 무엇의 본질을 더 가깝게 보기 위한 절대적 요소라는 것이다.


3부에 계속...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