찻잎처럼 가볍고 단단하게 8화
그곳은 이제 없지만,
나는 아직도 그곳을 생각하면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오른다.
판교 로웰스 일레븐의 남대표님.
시간이 지나도 남대표님의 모습은 여전히 선명하다.
잔잔한 재즈 선율처럼 고요하고 따뜻한 사람.
눈에 띄지는 않았지만 누군가를 품을 수 있는 묵직한 공간을 가지고 있었고,
말없이 곁에서 누군가를 조용히 응원할 줄 아는 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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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만남을 떠올려본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그날의 대화가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
차에 관한 이야기, 사람에 관한 이야기.
짧은 시간이었지만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라고 느꼈다.
나는 그분에게 어울리는 차를 만들고 싶었다.
속 깊고 따뜻한 사람이 마실 법한 블렌딩을.
여러 찻잎을 펼쳐놓고 밤새도록 고민했다.
부드럽지만 선명한 과일 향의 홍차,
로맨틱한 장미, 깊은 버건디의 컬러,
거기에 효능을 더해줄 아마란스와
잔향처럼 천천히 퍼지는 와인의 기운까지.
그렇게 완성된 차의 이름은 ‘레드벨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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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버를 잡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때로는 지나치게 화려해지기도 하고,
때로는 너무 단조로워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분의 분위기, 말투, 매장의 결을 떠올리며
수없이 스케치하고 다시 블렌딩했다.
차를 만들 때마다 나는 그분이 앉아 있을 매장을 상상했다.
창가로 들어오는 오후의 햇살,
차분히 흐르는 음악,
손님들과 나누는 진심 어린 대화.
그 모든 것이 내 블렌딩에 스며들었다.
결과물은 내게도, 그분에게도 깊은 여운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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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시음 때 그분이 보여준 미소를 잊을 수 없다.
“제가 원하던 맛입니다.”
그 한마디가 내 모든 노력을 보상해주었다.
10년을 거래하며, 3년째 되던 해에
나는 원자재 가격이 내려 차 가격을 내리겠다고 말했다.
그때 대표님은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닙니다. 넉넉히 받으시고 좋은 차 개발 많이 해주세요.”
그 말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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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을 하다 보면 가격에 민감한 사람들을 많이 만난다.
하지만 남대표님은 달랐다.
가치를 알아보고, 존중해주는 사람이었다.
대표님의 매장에는 특별한 분위기가 있었다.
각박한 세상 속에서도 그곳만큼은 느림의 미학이 살아 있었다.
차 한 잔을 대접하는 데 최소 15분을 들이는 곳.
급할 것 없이, 서두를 것 없이,
차와 함께 시간을 즐기는 법을 알려주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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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매장은 사라졌지만
그분은 여전히 내게 최고의 바이어로 남아 있다.
아니,
때로는 상상한다.
그분이 지금 어디에서 무슨 차를 마시고 계실지.
여전히 ‘레드벨벳’을 즐기고 계신지,
아니면 새로운 차를 발견하셨는지.
어디에 계시든,
분명 차분하고 따뜻한 공간을 만들고 계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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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다도 선생님이 내게 해주신 말이 있다.
“차는 사람을 벌어준다.”
그 말의 의미를 나는 사업을 하며 천천히 배웠다.
차를 통해 만나는 인연들은 단순한 거래 관계를 넘어선다.
그것은 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지점이다.
세상에는 나와 다른 결, 다른 속도의 사람들이 많고
때로는 그 차이가 상처가 되기도 한다.
모든 사람이 차의 깊이를 알아보는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그만큼 아름다운 사람도 많이 만났다.
믿고, 함께하고, 서로를 품어주는 관계.
그런 사람들을 나는 차를 통해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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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한 잔을 나누며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작은 찻잎에 담긴 자연의 향기를 함께 느끼는 것.
그것이 바로 차가 가진 마법 같은 힘이다.
나는 아직도 사람을 믿고, 품고, 사랑한다.
차가 내게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그 믿음 속에는
항상 레드벨벳처럼 따뜻하고 깊은
그분의 미소가 함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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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만들 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이 차를 마실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그들에게 어떤 순간을 선물해줄 수 있을까?
그렇게 한 잔의 차는 한 사람의 기억이 되고,
그 기억은 다시 내게 돌아와 새로운 차가 된다.
‘레드벨벳’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