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에서 배운 블렌딩의 언어

찻잎처럼 가볍고 단단하게 4화

by 이소연 Teana Lee


하동에서 전통차를 배우고, 덖음솥 앞에서 기다림을 익힌 지 어느덧 몇 해가 흘렀다. 찻잎을 다루는 손놀림은 익숙해졌지만, 나만의 블렌딩을 만드는 일은 여전히 막막했다. 차의 언어를 안다고 해서 그것이 곧 나의 언어가 되는 건 아니었다.


차 블렌딩의 영감을 찾는 길은 늘 나를 자연으로 이끌었다. 그날도 나는 지리산 깊은 숲을 향해 걸었다.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은 길,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작은 오솔길을 따라가다 보니, 숲은 점점 진해지고 공기는 차분해졌다.


걸음을 멈추고 한 번 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 순간 후박나무 향이 코끝에 스쳤다. 어디선가 피어오르는 은은하면서도 깊이 있는 그 향을 따라 나는 좀 더 깊숙이 숲으로 들어갔다.


그러다 문득, 나는 후박나무 꽃 군락지에 멈춰 섰다.


작고 하얀 후박꽃들이 나무 전체에 가득 피어있었다. 멀리서는 보이지 않았던 꽃들이 가까이 다가가니 각자의 향기를 내뿜고 있었다. 촉촉한 흙 향기와 이슬 맺힌 잎들의 숨결, 그리고 후박꽃에서 풍겨오는 그윽하고 따뜻한 향.


말로 다 담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나는 조용히 그 자리에 앉았다. 후박나무 아래에서 바라본 하늘은 초록 잎사귀 사이로 반짝이고 있었고, 바람이 불 때마다 꽃향기가 한층 더 짙어졌다. 무엇인가 이 순간을 기억해야 할 것 같았다.


눈을 감자, 그 향이 내 안으로 스며들었다. 짙은 초록, 깊은 흙, 은은한 꽃내음, 그리고 무언가 생명의 기운 같은 것들. 숲속의 모든 것이 조용히 나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그때 문득 깨달았다. 후박꽃의 향기는 혼자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흙의 습기, 나무껍질의 거친 질감, 주변 풀들의 연한 초록 냄새, 심지어 바람 속에 섞인 먼 산의 기운까지. 모든 것이 하나의 조화로움 속에서 완성되고 있었다.


"이것이 블렌딩이구나."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차를 블렌딩할 때 나는 늘 각각의 찻잎이 가진 개성을 살리려 애썼다. 이 찻잎은 어떤 향을 가졌고, 저 찻잎은 어떤 맛을 내는지 분석하고 조합하려 했다. 하지만 자연은 그런 계산이 아니라, 그냥 존재하는 것들이 서로 조우하여 만들어내는 자연스러운 어울림이었다.


"이 향을 잊지 마."

"이 순간을 잊지 마."


숲이 내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그날 이후, 나의 블렌딩은 달라졌다. 무리해서 조합하려 하지 않고, 찻잎들이 자연스럽게 만나도록 두었다. 마치 후박꽃이 숲의 다른 향들과 조화를 이루듯이.


하동 우전의 은은한 단맛, 제주 말차의 깊은 녹색, 지리산 야생차의 거친 야성미. 이들을 억지로 맞추려 하지 않고, 각자의 개성을 존중하면서도 하나의 이야기가 되도록 했다.


나는 마음 깊이 감사함을 느꼈다. 이토록 고요하고 완전한 순간을 나에게 허락해준 자연에게, 그리고 그 안에서 또 하나의 블렌딩을 떠올릴 수 있었던 나 자신에게.


그날, 숲이 내게 남긴 향기는 단순한 냄새가 아니었다. 그건 나를 이끌고, 나를 치유하고, 내가 앞으로 만들어갈 차의 이야기가 되었다.


지금도 새로운 블렌딩을 시도할 때면 나는 그날의 후박꽃 군락지를 떠올린다. 각각의 찻잎이 가진 고유한 향기를 존중하면서도, 그들이 만나 새로운 조화를 이루는 순간을 기다린다.

아마도 그 블렌딩은, 꽃이 피고 지고, 숲이 또다시 계절을 바꾼다 해도 영원히 내 안에 머물 것이다.


차 한 잔의 향기를 만들기 위해 나는 오늘도 자연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인다.


덖음솥 앞에서 배운 기다림이, 하동의 찻밭에서 익힌 인내가, 그리고 지리산 숲에서 발견한 조화의 법칙이 모여 하나의 블렌딩이 된다.


자연이 가르쳐준 블렌딩의 언어로, 나는 오늘도 새로운 차의 이야기를 써 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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