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또, 도둑이다.
벌써 세 번째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요.
나 종교로 귀의할래.
뚱뚱한 차장 아저씨가 퉁명스럽게 나를 깨운다.
겨우 눈을 뜨고 묻는다.
푸노?
Si!
버스에서 잠 고만 자고 얼른 내리라는 거다. 어이쿠, 이렇게나 잤나 싶다.
응? 그런데 뭔가 기분이 쎄하다. 뭔가 없다.
가방이 없다.
의자 발받이 아래 고이 넣어 놨는데.
이 깨끗하게 텅빈 공간을 본 순간 다시 패닉이다.
스산한 기운이 떠도는 버스 안, 머릿 속으로 빨리 상황을 돌이켜 본다.
11시에 탄 야간 버스는 잠이 한창 들었을 무렵인 새벽 5시 경 목적지에 도착했고 우리가 일어났을 때에는 이미 모든 사람이 내리고 달랑 우리만 여전히 깊이 잠들어 있었다.
사람이 그렇게 다 내릴 때까지 도둑이 가방을 가져가도 모를 만큼 깊이 자고 있었던 나도 어이 없고, 사람 많은 버스 속에서 통로 쪽도 아니고 창가 쪽에 앉은 내 의자 발받이 밑의 가방을 통째로 쏙 빼간 도둑도 참 간이 크다 싶다.
잠에서 갓 깨자마자 벌어진 이 상황을 대충 파악하고 나니
이제서야 가방 안의 내용물이 머릿 속에 하나하나 떠오른다.
여권,
외장하드!!
여행 중에 목숨처럼 간직하라는 여권에, 여행자의 목숨같은 사진들이 모두 저장된 외장하드.
여행의 핵심 두 개를 한 번에 잃어버린 거다.
눈 앞이 깜깜하다.
허둥지둥 버스 밖으로 뛰어나가 터미널을 살펴보지만 뭐가 보일 리 만무하다. 정신없이 주위를 둘러보고 있으려니 여행사 삐끼를 하러 나에게 다가왔던 아주머니가 가방을 도둑 맞았다고 하니 되려 같이 놀라서 내 손을 붙들고 터미널 경찰서로 데려가주었다.
다시,
경찰서다.
스페인어로 두번째 조서를 쓴다.
가방 안에 무슨 내용물이 들었는지, 얼마 상당인지.
조서를 쓰면서야 내가 이번에 대체 뭘 잃어버린 건지 실감한다.
폰 하나, 엠피쓰리 하나..이렇게가 아니라 가방이 통째로 없어진 충격은 분실의 구체성에 대한 실감을 없앤다.
'뿅, 없(어졌)다'
그 자체로 시각적인 충격이 너무 강해서 한동안 멍했다. 머리로는 잃어버린 순간 끝이란 걸 알지만 그래도 쉽게 버릴 수 없는 미련에 가방 안에 들어있던 샴푸, 마우스 하나까지 읊조리며 지푸라기라도 잡아본다.
분명히 버스 안에 있는 사람이 가져갔다.
그리고 버스 타기 직전까지 얘기를 주고 받았던, 내 바로 뒷자리에 앉아있던 푸노에 산다는 페루 남자가 몹시 의심스럽다.
그렇게 상냥하던 그는 나를 왜 깨우지도 않고 이렇게 내버려 두고 갔을까.
경찰은 버스회사에서 오늘 이 버스에 탄 모든 승객의 리스트를 뽑아왔다. 이름과 주민번호까지 적혀 있다.
그런데 왜 경찰은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을까?
사전까지 뒤져가며 떠듬떠듬 스페인어로 항의해보지만 내 손에 남은 건 달랑 분실 신고증 뿐. 이제 시내의 여행자 경찰소로 가보란다. 그래도 이게 있으면 국경을 넘을 수는 있을 거라나. 혹시나 하는 기대에 다시 한 번 터미널을 둘러보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돌려 터덜터덜 경찰서를 나와 시내로 향한다. 아르마스 광장 바로 옆에 큰 경찰소, 그 바로 옆의 작은 사무실이 여행자 경찰소. 데스크에서 접수하는 경찰관은 분실증을 펼치며 발을 동동 구르는 나에게 기다리라고 하더니 꼼짝도 않는다. 뭘 하나 봤더니 책상에서 홈쇼핑 전단지 같은 걸 뒤적거리고 있다. 휴.
사복을 입은 경찰관이 나와 나를 사무실로 데려간다. 뚱뚱하고 나이 많은 경찰 아저씨 한 명이 더 오더니 나에게 그제야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본다. 나는 모든 절절함을 담아, 사건을 설명하고, 특히 잃어버린 외장하드가 Muy Muy Muy Importante 하다고 호소했건만 아저씨는 무표정하게 단 몇 마디로 통역의 임무만을 수행하고 떠난다. 하, 다시 구글 번역기를 켜서 사건 정황을 정리한다.
경찰의 마무리는 이렇다.
- 터미널을 수색해봤는데 아무 것도 없었다고 한다.
- 가방을 다시 찾는 건 '아주아주 힘들' 거다.(항상, 불가능이 아니라 아주 힘들거라 둘러 표현해주신다.)
- 전에도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났다. 다른 여행자도 결국 못 찾았다.
- 무슨 소식이 '혹시라도' 있으면 메일로 알려주겠다.
= 그러니 이제 집에 가렴.
이렇게 무기력할 데가, 나도, 경찰도.
이럴거면 그 복잡한 서류는 뭐하러 만든 거며, 사무실까지 따로 번듯하게 여행자 경찰서를 따로 만든 이유는 대체 머시란 말인가! 뭐, 사실 더 화도 안나고, 할 말도 없고, 무기력하다.
이해가 가기 떄문이다.
하루에도 몇 건씩 같은 일, 사라져버린 도둑을 어디가서 무슨 수로 잡겠냐는 거지.
다만 잃어버린 것들이 내겐 너무 소중한 것이라서 이렇게라도 항의해보고 싶었다.
다시 택시를 타고 버스 터미널로 돌아가 주변을 무기력하게 돌아본다. 금방 포기하고 숙소로 돌아와 속상함이라도 잊도록 낮잠을 청했다.
그렇게 악명 높던 페루, 무사히 지나가는가 싶었더니
이렇게 거창하게 페루 마지막 도시에서의 첫 아침을 맞는다.
작은 도시, 소소한 인연.
그렇다고 하루 종일 누워 있을 수만은 없지. 원래 오늘 하려고 했던 우로스 섬 투어와 아만따니 민박을 알아보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에이전시를 들렀다가 나오는데 반가운 얼굴을 만났다. 쿠스코에서 만났던 연아. 일정이 비슷하니 만날 수야 있겠지 싶어도, 이렇게 네 번이나 길에서 우연히 만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더군다나 안 좋은 일을 겪은 아침이라 익숙한 얼굴이 어찌나 반가운지. 거리 한 복판에서 오늘 아침 도둑맞은 얘기를 우렁차게 설명하며 분통을 터뜨리고는 한결 후련한 마음으로 같이 저녁을 먹으러 갔다.
갑자기 비가 내려 쫓기듯 마침 눈 앞에 있던 가이드북에 나왔다는 피자집으로 들어갔다. 피자는 맛있었고, 맛있게 식사를 끝내니 불이 꺼지고 촛불이 탁자 마다 하나씩 놓였다.
정전이 된 거다.
여기서는 흔한 일인 것 같았다.
웨이터들은 마치 이벤트나 되는 듯 예쁘게 콜라병에 초를 꽂아 일사불란하게 테이블을 밝혀 주었다.
그러나 아무도 항의하지 않는다.
이마저도 즐긴다는 듯 웃으며 식사를 이어나가는 사람들 속에서
나 또한, 그 깜깜함 속에서 마지막 피자 한 조각을 털어넣으며
오늘의 나쁜 기억을 털어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