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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영 Jun 18. 2018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_다시 읽기

'두 번 다시 반복될 수 없음'에 대해

36
자신이 사는 곳을 떠나고자 하는 자는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다.

87
외국에 사는 사람은 지구 위의 빈 공간을 걷는 사람이다.


256
이런 질문에 한 가지 해답만이 존재할까?
그리고 다시 한번 우리가 이미 알고 있던 생각이 그의 머리에 떠올랐다.

인간의 삶이란 오직 한 번만 있는 것이며 모든 상황에서 우리는 딱 한 번만 결정을 내릴 수 있기 때문에

과연 어떤 것이 좋은 결정이고 어떤 것이 나쁜 결정인지 결코 확인할 수 없을 것이다.


여러 가지 결정을 비교할 수 있도록 두번째, 세번째, 혹은 네번째 인생이 우리에게 주어지진 않는다.


개인의 삶처럼 역사도 마찬가지다.

체코인들에게 역사는 하나뿐이다.

토마스의 인생처럼 그것도 두번째로 수정될 기회도 없이 어느 날 완료될 것이다.


257
한 번은 세어질 수 없다.

한 번이란 영원이 아니다, 란 뜻이다.

유럽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보헤미아의 역사도 두번 다시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보헤미아의 역사와 유럽의 역사는 인류의 치명적 미체험이 그려낸 두 개의 초벌그림이다.


역사란 개인의 삶만큼이나 가벼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깃털처럼 가벼운, 바람에 날리는 먼지처럼 가벼운,

내일이면 사라질 것처럼 가벼운 것이다.

                                                                          
258
얼마 후 그는 다시 이런 생각을 했고, 나는 앞 장의 뜻을 밝히기 위해 이를 언급하고자 한다.


우주 어디엔가 우리가 두번째 태어나는 행성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또한 지구에서 보낸 전생과 거기에서 익힌 경험을 완벽하게 기억한다고 해보자.
그리고 이미 두 번의 전생 체험을 가지고 세번째로 태어나는 또 다른 행성이 존재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인류가 매번 성숙도를 높이면서 다시 태어나는 다른 행성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영원회귀에 대한 토마스의 생각이다.


지구(1번인 행성, 미체험의 행성)에 사는 우리는 당연히 다른 행성에서 인간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에 대해서는 막연한 개념밖에 지닐 수 없다.


인간이 더 현명해질까? 인간이 완숙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 반복함으로써 이에 도달할 수 있을까?


비관주의와 낙관주의가 의미를 갖는 것은 바로 이런 유토피아에 대한 전망 속에서만 가능하다.

낙관주의자란 5번 행성에서는 인간의 역사가 덜 피투성이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비관주의자란 그런 것을 믿지 않는 자이다.




2018.6.18

한 번 읽은 책, 한 번 본 영화를 다시 보지 않는 편이다. 좋았던 경우라면 더욱. 처음 느낀 감동이 바래질까 무서웠던 것 같다. 그런데 이 책은 세 번 정도 다시 읽었다. 10년 정도의 간격을 두고.


처음 읽었을 때는, 관계의 형식의 다양함에 대해서 받아들이는 것을 배웠다. 그때는 이 책에서 말하는 무거움과 가벼움이 관계의 형식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일까. 촘촘하거나 느슨한 관계 사이에서 부유하던 토마시의 삶과 고민을 읽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자신은 누군가에게 테레자이기를 소망했다. 무거움을 중요함과 연결했던 것 같다.


두번째 읽었을 때는 무거움이 곧 중요함은 아니라는 것, 가벼움의 의미와 필요성에 대해서 인식했다. 그때의 연인에게 나는 한없이 무거웠고, 나는 그 무게 속에서 안정감을 느끼면서도 한없이 가벼워지기를 소망했다. 불안해 하는 그에게 나는, 내가 마음 놓고 가벼워질 수 있도록 중력을 주어서 고맙다고, 몇 번이고 진심을 다해 말했지만 나조차 이해하지 못한 모순을 설득시킬 수는 없었다.


세번째 읽었을 때는 영원회귀에 대해서 생각했다.


"einmal ist keinmal. 한 번은 왜, 전혀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일까. 한 번의 스침도 나에겐 이렇게 큰 의미로 남아있는데."한 번의 우연을 필연처럼 무겁게 붙잡고 싶었던 시절, 그 문장은 의문부호 투성이인 채로 내 안 어딘가에 붙어 있었다. 


그런데 이 책을 세번째로 다시 읽을 즈음, 처음 그 문장을 읽었을 때 풀리지 않던 의문부호들이 스르륵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삶에 대해서도 관계에 대해서도 나는 늘 막연히 낙관했다. 반복을 통해 더 나아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딘가에 덜 피투성이일 5번 행성을 만나기를 고대하며 후회도 미련도 수없이 반복했다.


영원회귀의 세계에서는 인생 전체도 단 한 번 뿐인 찰나의 순간. 삶이 한 번 뿐이라면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라는 허무주의는 오히려 삶에, 순간에 충실하도록 하는 역설이다. 지금 고통의 순간을 감내하게 하는 주문이다. 같은 어긋남을 영원히 반복할 것을 생각하면 오히려 마음이 편해지는 것이다.

그 어떤 미련도 깊은 후회도 무의미해지는 영원회귀의 세계에서 나는 어떤 무게도 없이 부유한다. 언젠가 완벽한 행성에 닿으리라는 기대없이, 그럼에도 나는 이 삶을 나로서 다시, 몇 번이라도 다시 살아보리란 결심에 대한 확신으로.

 

그리고 다시,

사람을 알아간다는 것은 책을 읽는 것과 같은 일이라는 말을 곱씹는다. 금 이 책을 내가 다 읽은 것이 맞을까. 다시 책장을 넘길 필요가 없을까. 나의 이 처음은 이대로 무한히 반복되는 것일까. 머리와 마음은 여전히 멀기만 하다.



einmal ist keinmal. 한 번은 없었던 것과도 같다. 인간의 삶이란 오직 한 번만 있는 것. 영원성이 무거움이라면 이 일회성은 가벼움이다.

그러나 이 대립이 옮고 그름이나 좋고 나쁨의 가치로 환원되는것은 아니다.

 

Es muss sein. 그래야만 한다. 즉 필연과 우연도 마찬가지다. 특정한 시점에서 특정한 사건과 직면하여 과연 그래야 하는가 하고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 모든 사건은 전부 단 한번 뿐인 까닭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물음을 던질 수밖에 없다. 한 개인의 삶과 한 국가, 나아가 세계의 역사는 그렇게 만들어진다.


"슬픔은 형식이었고, 행복이 내용이었다. 행복은 슬픔의 공간을 채웠다."


무거움과 가벼움의 모순이 얘기하는 것은 결국, 긍정과 초월의 철학이다.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570770&cid=58814&categoryId=58831


p.157 열한계단


영원회귀. 목적도 이유도 없이 팽창과 수축을 무한히 반복하는 세계. 영원하고 조금도 변화하지 않는 반복의 세계. 이런 영원회귀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허무주의의 최고 형태다.


어느 날 당신이 좌절한 그 어느날 밤, 인생 전체를 통틀어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 악마가 찾아온다. 그리고 당신의 귀에 대고 속삭인다. 이 순간은 영원할 것이다. 너의 삶은 어떤 목적이나 이유도 없이 영원히 반복될 것이고, 이 고통의 순간은 영원히 너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당신에게 묻고 싶다. 어떤가? 당신은 영원회귀의 진실이 어떻게 받아들여지는가? 끔찍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그래!" 하고 외칠 수 있는가?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고통스러운 당신의 삶 전체를 앞에두고, "이것이 인생이라면 그래, 한 번 더!" 이라고 긍정할 수있는가?


이러한 극단적인 허무를 인정하고 나의 삶을 끌어안을 수 있는 존재. 허무의 깊은 심연 속으로 뛰어들 수 있는 존재. 그가 바로 초인이다.


나는 두려웠다. 초월적인 구원의 세계를 쫓느라 내팽개쳤던 구체적인 삶의 시간들이 나를 원망하는 것 같았다. 한산한 캠퍼스를 걸으며 고민했다. 전날 밤에 내린 비에 교정은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놀랍지 않은가. 이 싱그럽고 건강한 순간을 나는 무한히 경험해왔던 것이다.


내가 이 삶을 다시 선택한 이유, 한 번 더 나로서 살아보기로 결심한 이유는 바로 이 순간을그렇게도 다시 보고 싶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찰나의 순간은 무한히 중첩된 내 삶의 한 지점을 강하게 꿰뚫고 있었다.


하늘이 아니라 대지를 걸어가야겠다. 걸어가면서 만나는 모든 것과의 영원한 순간을 긍정할 수 있는 그런 삶을 살아야겠다. 나는 그렇게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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