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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영 Jul 26. 2016

진공의 시간을 통과하기

‘쓸모 없음’의 소중함에 대하여

내 이름은 지영.


나는 세상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내 이름이

너무 흔해서 싫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내 이름을 좋아하게 되었다.

 ‘영’자를 다르게 풀이하면서 부터다.

그리고 사람들을 처음 만날 때면 꼭 내 이름의 뜻도 함께 소개해줬다.


‘뜻 지’에 ‘꽃부리 영. 풀이하면 ‘뜻을 꽃피워라.’


그렇게 설명하고 나면 

왠지

평범한 내가 특별해지는 느낌이었다.

3월, 나는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점점 따사로워지는 날들 가운데 캠퍼스를 거닐며 나는 ‘나의 쓸모’에 대해 오래 생각했다. 부모님은 다시 공부를 하러 가겠다는 내 뜻을 애써 꺾지는 않으셨지만 못내 아쉬워하셨다.


‘이왕이면 쓸모 있는 공부를 하지 그러니.’


쓸모 없는 공부를 하려는 나는 과연 쓸모 있는 인간인가.

나는 과연 어떤 뜻을 꽃피우고 있는 걸까?

나는 나의 쓸모를 찾기 위해 책을 뒤적였다. 내가 좋아하는 어느 작가는 ‘무의미의 시간’을 말했고, 또 다른 작가는 ‘진공의 시간’을 말했다. 쓸모 없는 일에 천착했던 그 시간들이 지금의 자신들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들의 문장은 나의 죄책감을 조금이나마 덜어주었다.

그 덕분이었을까?

직장을 그만두고 대학원으로 들어가기 전 나에게 주어진 두 달의 시간,

나는 나에게‘진공의 시간’을 주기로 했다.


생로병사에 대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바라나시를 그리며 인도로 가는 비행기 티켓을 끊은 것이다.

나의 선택에 아무도, 어떤 말도, 어떤 판단도 하지 않을 곳에서 ‘의도와 목적을 잊어버리고 마음을 방목’해보면 무언가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바라나시에 도착한 다음 날부터 나는 많이 아팠다.

고열에 시달리느라 이틀을 침대에 누워서 보냈다. 정신을 차리자 마자 이 곳에서 뭘 하며 시간을 보낼 지 초조하게 찾기 시작했다. 삶의 의미에 대한 고찰을 할 여유따윈 없었다. 나는 빠르게 지쳐가고 있었다. 문득 ‘쓸모 있게’ 시간을 보내기 위해 노력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한시도 의미를 만들어 내지 않으면 뒤쳐진다는 압박감 속에서 여태껏 살아온 관성이다.

아무 것도 챙기지 않고 맨몸으로 숙소 밖으로 나왔다.

하루 24시간 시체를 태우는 화장터에 가만히 앉아 있다가 강가를 따라 걸어 올라갔다. 항아리를 문질러 소리를 내며 노래하는 외국 청년들, 넓은 벽에 뭔가를 그리고 있는 늙은 남자, 그 앞에서 공놀이를 하고 있는 아이들, 여행객들에게 실없이 말을 건네며 같이 사진을 찍자고 청하는 인도인들. 세상에는 한없이 쓸모 없는 일들로 시간을 채우고도 행복해보이는 사람들이 참 많았다.

나무 밑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대학생들과 눈이 마주쳤다. 나도 함께 해도 되냐고 손짓으로 물으니 고개를 끄덕였다. 생생한 미소와 함께. 그들과 나란히 앉아 가사도 모르는 노래를 함께 흥얼거렸다.


그날의 하루는 그것으로 충분히 아름다웠다.


돌아온 캠퍼스에도 등 뒤에 기타를 하나씩 메고 있는 학생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무용한 것들에 그렇게 기꺼이 시간을 쏟아 부을 수 있는 날들에 ‘아름답다’는 말을 왠지 건네고 싶어졌다.

3월이 끝나간다.

나무 위에는 연두색의 싹들이 조용히 웅크리고 있다. 봄은 열매를 맺을 다음 계절을 향해 지나가는 계절이다. 곧 하나 둘, 꽃은 피어날 것이다. 어떤 꽃은 열매를 맺지 못한 채 그저 사그라들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계절, 충분히 아름다웠던 꽃은 쓸모를 맺지 못해도 그 자체로 아름답다.



뜻을 꽃 피워라.’

나는 나의 이름을 조용히 되뇌어 본다.

쓸모 있는 무엇 하나 피워내지 못한 나의 이십 대는 무의미와 싸우는 진공의 시간이었다.

이제 나는 꽃과 같이 그 진공의 시간을 통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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