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삶의 가능성에 대한 상상
2018.6.27
2013년은 나에게 중력 밖에서 세계로 귀환한 해였다. 2012년 스물넷의 킴에서 2013년 스물여섯의 지영으로.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지만 풍요로웠던, 나의 스물다섯은 중력 밖에서 조용히 흩어졌다. 결코 반복될 수 없을 순간을 다시 살아보고 싶은 마음으로, 흩어진 순간들을 모아 그 해의 일기를 다시 써보기로 했다.
다시 쓰는 삶 속에서 나는 조금 더 나 자신으로 살 수 있을까?
2013. 3.2
#. 6개월, 생각지도 않게 긴 여행이 되어 버렸다.
여행 막바지,
현실로 돌아갈 때가 얼마 안 남은 이 시점에서는 시간과 돈을 있는 대로 쏟아 부은 이번 여행에서
내가 얻은 것이 뭐가 있을까를 어쩔 수 없이 돌이켜 보는데,
없다.
객관적으로는 아무 것도 없다.
나는 말 그대로 알거지가 되었고 돌아갈 서울에는 당장 몸 하나 뉘일 곳도 없다.
외장하드가 든 배낭을 통째로 도둑 맞는 바람에 사진과 자료도 몽땅 없어졌고.
그뿐인가. 여행을 하면 사람이 변한다는데 내 자신이 그다지 변한 것 같지도 않다.
여전히 칠칠치 못해서 물건을 잘 잃어버리고
시간을 잘 못 지켜서 매번 허겁지겁 뛰어다니고
얘기에 빠지면 목소리가 커진다.
결국 많은 것을 보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서 곱씹어 볼 추억이 많아졌다는 건데,
그런건 꼭 이렇게 비용과 시간을 들여 여행을 해야만 얻는 건 또 아니다 싶다.
근데 이상스럽게도 행복감을 자주 느끼게 되었다.
가끔은 소소하게, 가끔은 벅찰 만큼.
혼자 있든 함께 있든. 어딘가 대단한 데를 가지 않더라도.
빈- 풍경을 오래오래 바라볼 마음의 여유도 갖게 되었다.
* 칠레는 과일이 아주 쌌다. 특히 내가 제일 좋아하는 복숭아가 한바구니 가득 천원쯤 했다. 별 일 없이 시장에 가서 복숭아를 사서 돌아와 깎아 먹으면 하루가 다 갔다. 그런 하루가 이유없이 행복했다. 복숭아를 사고 돌아오는 길에 공원에 한가롭게 쉬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도 이유없이 마음이 뭉글뭉글 따뜻해졌다.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여행이 일상 같아진다고 초조해지지 않았고,
그 어떤 특별한 일을 하지 않는 하루에도 죄책감이 들지 않았다.
이런 행복의 이유가 뭘까 생각해봤다.
설명하기 어렵지만, 나를 더 사랑하게 된 것 같다.
거기서 거기인 똑같은 옷만 입고 다녀도 초라하지 않고
화장 안 한 얼굴도 꽤 귀여운 것 같고 하루 종일 걸어도 안 지치는 튼튼한 다리도 자랑스럽다.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 내 감정에, 더 솔직해진 것 같다.
슬플 땐 슬퍼하고 외로울 땐 외로워하고 행복할 땐 맘껏 행복해하고
그때 그때 감정에 충실히 귀를 기울이기 시작하니까 당당해진 것 같다. 숨기는 게 없으니까.
여행을 떠나고 나에게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 자신을 더 사랑하게 되었다.
2018.5월
여행이 내게 남긴 것을 되새겨 보았다.
그건 단순히 어떤 새로운 장소를 '가본' 경험이 아니라
'이런 삶의 형태도 가능하겠다'는 것을 눈으로 보고 듣고 발 딛고 경험하고 몸으로 깨닫는 것.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것, 그 속에 또 다른 형태의 행복과 사랑이 있다는 믿음. 그 믿음이 북돋아 주는 용기.
그런 믿음이 몸 속 어딘가 깊이 새겨져서 일까.
한국에 돌아와 지난 5년, 마음 끌리는 대로 시간을 써도 아주 많이 조급하거나 불안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돌고 돌아 다시 느끼는 건, 지금 이 땅에서 행복하지 않으면 어디서도 행복할 수 없다는 것.
내가 지금 발 딛고 있는 곳에서도, 그곳이 어디든 행복하기 위해서,
그리고 내가 그런 용기를 얻었듯 그 마음을 전하고 싶어서, 그런 마음으로 글을 썼다.
근거없는 낙관 덕에 여유로 충만했던 내 일상에서 오랜만에 찾아온 촘촘한 날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