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달만에 고향집을 방문했다. 가족들 모두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을 평일 오후, 집에는 할머니와 나 둘만 덩그러니 남겨져 있다. 밀린 수다를 늘어놓고나서 할머니는 혼자서 화투를 친다. 나는 책을 좀 읽다가 거실 중간까지 깊이 늘어지는 봄햇살에 나른해져 할머니 무릎을 베고 잠깐 낮잠을 잔다. 이 풍경에 나를 뺀 것이 할머니의 보통날이겠지. 점점 하얘져 검버섯이 더 도드라져보이는 할머니의 말간 얼굴이 그제야 눈에 들어온다.
할머니, 산책이나 갈까요?
대답 대신 할머니는 뚝딱 외출준비를 마치고 나오셨다. 고모가 사줬다고 자랑하던 자주색 자켓에 연보라색 모자를 쓰고 분홍색 스카프까지 곱게 두른 할머니는 머리가 어수선할 때는 모자를 이렇게 쓰면 딱이라며 수줍게 웃어 보이신다. 봄같이 곱다고 하니 할머니가 내 팔을 잡고 뒤로 숨는다.
그렇게 서로를 붙잡은 채로 엘리베이터를 탄다. 삭막한 아파트 단지지지만 그래도 갈 수 있는데 까지 걸어가보기로 했다. 얼마 가지 않아 아파트 담장 옆으로 피어난 빨간 철쭉을 보더니 할머니가 걸음을 멈춘다.
할머니, 사진 찍어 드릴까요? 백날 찍으면 뭐해. 나는 볼 수도 없는데. 그러면서 꽃 옆으로 가 조용히 선다. 할머니, 조금 만 더 웃어보세요. 이건 제가 나중에 인쇄해서 드릴게요.
아파트 단지 근처 초등학교 옆에 작은 놀이터가 있길래 거기까지 가보기로 했다. 조금 더 가서는 길가에서 하얀 조팝꽃을 발견했고, 멀리 나무 사이에 숨어있는 보라색 꽃도 발견해 앉아서 보다가 일어섰다. 할머니는 쑥스러운 목소리로 쉬자고 하는 대신 여기저기 숨어 피는 꽃을 기가막히게도 잘 찾아내셨다. 그렇게 우리는 십분 정도 걸리는 길을 매매 쉬어가며 오래오래 걸었다. 가는 곳마다 꽃길이었다.
고놈 장미가 참 빨갛고 예쁘네.
알록달록 꽃 화분이 가게 앞을 싱그럽게 채우고 있는 꽃집 앞도 물론 그냥 지나갈 수 없었다. 보라색, 노란색, 흰색 꽃도 있었지만 할머니는 화사하고 선명한 빨간 장미 화분에 한눈에 반한 눈치였다. 한줄기에서 피어난 8송이의 장미가 제각각의 크기와 방향으로 뻗어 있었다. 괜히 살 것 없다며 서투르게 말리는 할머니의 작은 말소리를 뒤로 하고 빨간 장미 그루와 퇴비를 산다.
집에 오자마자 놀고 있던 화분을 찾아 장미를 옮겨 심는다. 검고 촉촉한 퇴비와 건강하게 자라라는 바람을 잔뜩 섞어서. 흰 바탕에 파란 줄이 있는 넓은 화분이 빨간 장미와 참 잘 어울렸다. 물을 흠뻑 주고는 햇볕을 잘 보라고 베란다에 두었더니 거실에서도 잘 보인다.
아이고, 오늘은 손녀딸 덕에 호강했네. 여행을 한 것 같아. 빨간 놈이 너무 이쁘다. 천번 만번을 봐도 안 질릴 것 같아.
매일 텔레비전을 향해 있던 할머니의 구부정한 등이 오늘은 베란다 쪽을 향해 있다. 30년을 마당이 있는 한옥집에서 텃밭을 가꾸던 할머니가 콘크리트 단지 사이에서 처음 맞는 봄이다. 꽃을 볼 수 있는 짧은 산책길도 할머니에겐 여행같이 큰 일이라, 손 뻗어 닿을 거리에 생생한 빨간 빛을 뿜어내는 장미 화분을 할머니 등 너머로 기특하게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