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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영 May 25. 2019

36년간 달려있던 명패를 떼다.

할머니의 한옥집, 마지막 밤

텅 빈 연탄 창고에 까만 석탄 가루만 남아있다. 


이 창고에 연탄이 가득가득 쌓여 있던 시절을 겨우 떠올려본다. 아직 조그맣던 언니가 똥통에 빠져 동네 웃음보를 터뜨리게 만들었던 푸세식 화장실의 뚜껑은 덮 지 오래다. 그때는 할머니가 하얗게 변한 연탄재를 꺼내며 아빠를 부르면 저 창고에서 연탄집게로 새까만 연탄을 집어나오는 풍경이 너무나 당연했는데, 방안에 스위치만 누르면 온도 조절과 시간 예약까지 되는 보일러를 틀며 겨울을 나는 요즘엔 그 기억을 떠올리는 것조차 어색하다. 한때는 당연했지만 어느 순간 하나도 당연하지 않아진 많은 것들이 이제는 흔적으로 겨우 기억을 불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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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2018. 36년 동안 달려있던 명패를 떼는 것을 함께 보기 위해 안동 할머니댁에 내려왔다. 



이 집에 늘 걸려있던 명패에 한자로 적힌 이름을 나는 그간 당연하게도 할아버지의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할아버지의 이름도 얼굴도 모르면서. 너무 일찍 남편을 잃은 할머니는 어린 두 자식을 홀로 키우며 아픔이 될 어떤 기억도 남겨두지 않았다. 작은 보금자리에서 이십여년 부대끼며 살아오다가 새로 지어진 멋들어진 한옥에 마당까지 가진 이 집으로 이사오면서 할머니는 자랑스러운 장남의 이름을 명패에 새겨 걸었다. 문패를 처음 달았을 때 이십대의 건장한 청년이었던 아버지는 문패를 내리는 오늘 환갑의 나이, 희끗한 머리로 서 있다.


마지막 기억을 남기기 위해 집 안을 구석구석 다시 살피며 사진을 찍었다. 가득했던 잡동사니들을 다 들어내고 나니 세월의 흔적이 더욱 선명했다. 당연한 세월을 지나오는 동안 집안 곳곳 속속들이 낡아 있었다. 당연하게 늘 내 뒤에 서계실 것이라 생각했던 할머니, 아버지처럼.


한때는 당연했지만 어느 순간 하나도 당연하지 않아진 많은 것들이 아직 내 옆에 남아있다. 


영원하지 않으므로 당연하지 않다. 


떠나는 순간에야 아쉬움에 잠 못이루는 이곳에서의 마지막 밤, 

꼬마 때처럼 할머니의 푸근한 품으로 파고 들어 고개를 묻은 채, 

영원하지도, 당연하지도 않은 존재와 사랑에 대해 오래오래 생각했다.


 

어렸을 적엔숨바꼭질도 했던 다락방. 가득했던 짐이 다 빠졌는데도 이렇게나 작아보일 줄 몰랐다.
같은 하늘이지만 처마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꼭 액자 속 그림같았다.
우리가 올 때마다 주차할 자리를 만들어주려고 할머니가 매번 집 앞에 꺼내놓았던 의자, 이 풍경도 마지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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