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렬한 빨강의 작은 차가 옆 차선의 거대한 메가버스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힘겹게 열을 맞춰 달린다. 운전자는 메가버스의 위치를 살피며 왼손으로는 운전대를, 오른손으로는 휴대폰을 잡는다.
위험천만한 동행의 이유는 단 하나, 와이파이.
우리는 신나서 소리를 지르며 메가버스에서 터지는 와이파이 신호를 잡아서 재빠르게 인터넷과 메시지를 썼다.
(마치 기생충의 첫 장면이 떠오르는) 때는 바야흐로 2012년. 캐나다에 여행을 왔던 나는 비싼 기차비를 아껴보겠다며 공유차량 서비스를 통해 만난 마리의 빨간차에 올라타 함께 벤쿠버에서 토론토로 가던 중이었다. 차의 뒷좌석에는 텐트와 베개와 이불이 아무렇게나 펼쳐져 있었다.
마리는 에어캐나다의 승무원이었다.
1년에 딱 2개월만.
나머지 10개월은 할인 항공권으로 여행을 다니며 산다고 했다. 그러니까- 그에겐 집이 필요하지 않았다.
토론토에 있는 시간은 겨우 두달이니까.
돌아다니다가 적당한 숲을 찾으면 텐트를 치고 마땅한 곳을 찾지 못하면 뒷좌석에 자면 충분했다. 샤워는 시내에 있는 친구들 집을 돌아다니면서 한다고 했다.
이 작은 빨간 차가 말하자면, 그의 집이었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마리의 당당한 밝음이 너무나 압도적이라서 나는 이 이야기와 순간을 또렷하게 새겨 넣고 말았다.
이런 삶이 가능하다고?
가슴이 마구 부풀었다. 마음 속으로는 이미 커다란 풍선을 잡고 하늘 저 높이 날아가고 있었다. 자유가 지상목표였던 시절, 나는 빛을 찾은 것만 같았다.
왈가닥 마리, 집은 없지만 팀홀튼 햄버거 세트를 사주는 여유는 가득 가지고 있던 :)
그 후 6개월. 여행이 일상이 되기에 충분한 시간 동안 바퀴 달린 배낭 하나를 매고 나는, 살았다.
"긴 후드 자켓, 줄무늬 얇은 니트, 하늘색 얇은 남방, 여름 면원피스, 까만 긴팔티, 하얀 반팔티, 청바지 두 개, 반바지 하나.
갑작스러운 트레킹을 위해 샀던 짝퉁 노스페이스 고어텍스 자켓 하나,
추워지는 고산지대에서 샀던 알파카 가디건 하나.
새끼 발가락 쪽이 계속 터져서 세 번은 꼬매신은 회색 운동화 한 켤레와 보라색 쪼리 한 켤레. "
8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그때 내가 가지고 있었던 물건들을 하나하나 꼽을 수 있다. 매일 그 옷이 그 옷인 꾀죄죄한 몰골에도 한껏 해사할 수 있었던 날들이었다.
하지만 지금 내 옷장은?
삼단의 서랍장과 두 칸짜리 옷장에 미어터지도록 옷이 '담겨있다'. 그뿐인가? 정리하자고 나선 김에 창고에 쌓아 두었던 봄여름 옷 박스도 꺼내왔다. 옷장과 박스에 들어있던 옷을 우선 모두 꺼내 풀어헤쳤다. 방바닥에 옷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겨울옷을 우선 골라냈다. 기억도 안나는 옷들이 수두룩했다.
옷장에 들어갈 만큼의 옷만 남기고 정리하는 것이 오늘의 목표였다. 버리냐 마느냐, 옷의 생사를 결정하는 순간에는 항상 세상 가장 보드라운 마음을 지닌 우유부단 결정체가 되고만다. 결국 여전한 '옷의 산' 앞에서 심각한 고민에 빠진다.
'미니멀라이프, 할 수 있을까?'
미니멀라이프를 마음 먹은 지 한 달.
힘껏 마음을 먹고 공간을 비워도, 비운 만큼 새로운 물건으로 공간을 채우는 날들이 한동안 이어졌다. 배낭 하나에 들어갈 만큼의 물건을 소유하던 그 자유롭던 시절로 나는 영영 돌아갈 수 없을 것만 같아 덜컥 두려워졌다.
시간은 많은 것을 바꿔놓았다. 쌓인 시간동안 나는 더 많은 것을 소유하게 되었고 대신 큰 것 하나를 잃었다. 언제든 어디로든 떠날 수 있는 자유. 자유의 '가능성'. 사소한 불편은 더 감수하고, 짧은 기쁨을 조금씩 더 내려놓기로, 오늘도 다짐한다. 가능성을 들여놓을 공간을 만들기 위해.
당장은 선택하지 않을 자유라도 상관없었다. 일상이 버거워질 때, 새로운 영감이 필요할 때, 막힘없는 상상으로 달려갈 수만 있다면. 때로 가능성만으로도 우리는 자유로워질 수 있으니까. 새로워질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