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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영 Aug 20. 2020

건강한 고독, 단순한 시간



#. 바라는 것은 딱 하나였다.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일을 하며 살아가는 삶.

하지만 우리는 단지 꿈을 꾸기 위해서 이미 인생을 다 써버린다.

진짜 원하던 것이 무엇인지 고민해 볼 여유조차 가지지 못한 채로.


오롯한 자신이 되기 위한 단절과 건강한 고독

언제든 자유롭게 이동하고 원하는 곳에 머무를 수 있는 삶


요즘 나의 꿈은 단순하다.


#.해방의 공간


'해방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선 그 자리를 해방의 공간으로 전환시키는 것'

'자신이 사는 곳을 떠나고자 하는 자는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다'

고민의 시간 속, 책에서 찾은 이 말들을 오래 마음 어느 한켠에 품고 있었기에 나는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았을까?


지금 돌이켜보면서 생각한다. 무기력한 시간들을 겪으며 과거 장기여행의 자유롭던 시절의 향수와 미래에 대한 고민 사이에서, 내가 있어야할 곳은 여기가 아니라는 생각 때문에 괴로웠다. 그래서 내가 살 다음 장소를 찾기 위한 여행을 떠났다. 오래 눈여겨 보고 있던 도시들로 가서 2주~1달 정도 머물렀다. 발리, 오로빌, 베를린, 헬싱키. 그곳에서의 삶은 실제로 어떨지 직접 보고 느끼고 싶었다. 여차하면 진짜로 일을 구해서 살 수 있도록 1년짜리 워킹홀리데이 비자까지 준비해서 갔다.


새로운 눈을 가진 여행자로서의 일상은 당연히 흥분과 아름다움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고민은 조금도 말끔해지지 않고 더 울퉁불퉁해졌다. 즐거웠지만 행복한 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이런 일상이 얼마나 지속가능할까?


나는 스스로에게 자꾸만 되물었다.


이 장소에 있는 것만으로 나는 정말 행복해질 수 있을까?


무엇보다 나는 한 장소에 붙박이처럼 정착하는 삶을 스스로에게 상상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이건 장소의 문제가 아니다.


어디에 있어도 행복해지고 싶다고 생각했다. 누구와 소통하며 어떤 일을 하는지, 그 선택의 폭을 넓히고 유연해질 수 있는 라이프스타일을 만들면 내가 원할 때 내가 원하는 곳에 있을 수 있다. 내가 진짜 원하는 건 그것이었다. 마냥 떠돌이처럼 돌아다니고만 싶지도 않고, 한 곳에만 머물러 있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그런 선택의 자유도를 높일 수 있는 방향으로 내 삶을 새롭게 만들어 보자."


그렇게 결심하고 다시 비행기를 탔다.


다시 1년이 지났다. 그리고 1년 짜리 비자가 얼마 전 만료됐다.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받을 수 있는 나이는 이제 지나버렸다. 하지만 이제 그런 건 필요하지 않을 것이고, 내가 그렇게 만들 것이다.


#건강한 고독


여름 동안 싱그러운 초록으로 둘러싸인 마당이 있는 작은 한옥, 전라남도 강진의 한 한옥에서 살게 되었다. 이곳은 이름처럼 소박해서 아름다운 마당 속에서 소소한 여유를 물씬 누릴 수 있는 다정한 곳이었다. 순하디 순한 진돗개 산이와 에너지 넘치는 프렌치 불독 돌이, 새침한 고양이 양양이가 일상의 활기를 더했다.


사실 한옥집의 사진을 처음 받은 순간부터 이곳에서의 하루를 매일 상상하며 미리부터 행복을 만들어냈다.


아침에는 조용히 차 한잔을 하며 마당을 바라봐야지,

텃밭에서 제각각의 속도로 자라고 있는 토마토는 매일 세심하게 살피며 방울방울 따 먹어야지,

새소리만 들리는 고요한 밤에는 대청마루에 앉아서 글을 써야지.


생각보다도 더욱 이 작은 마을에서의 시간은 단순했다.

마을 구경이래봐야 10분이면 뚝딱 끝나버렸다. 도암의 중심을 가로지르는 큰길(=유일한 이차선 도로)를 걷다보면 마을의 모든 가게와 공공시설을 만날 수 있다.  소소원 이름처럼 소박한 이곳의 풍경이 소소하게 스며든다.


아침의 일과는 생각보다 바쁘다. 풀벌레 우는 소리를 들으며 일언 창호지 바른 문을 모두 열어 젖혀 환기를 시켜주고 대청마루의 문도 접어서 올린다. 대청마루에 앉아 슥슥 커피를 갈아서 향기를 맡으며 내린다. 조금 출출해진다 싶으면 계란 후라이를 하나 해서 접시를 추가로 올린다. 하지만  끽해봐야 이동동선을 생각해보면 대청마루 건너 옆방으로 건너가는 수준이라 복잡할 것이 없다.  


밥 먹으러 나갈 때도 메뉴를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식당은 딱 세군데. 메뉴는 모두 백반. 산책 코스도 항상 똑같다. 큰길에서 살짝 옆으로 빠지는 길로 올라가면 드넓은 논이 펼쳐지고 그 사이에 난 흙길을 걷고 싶은 만큼 걷다가 돌아온다.


누군가와 딱히 말할 일도 없지만 그렇다고 딱히 외로워 질 일도 없었다. 산책 때 가끔 마주치는 할머니들은 프렌치 불독인 돌이가 돼지인지, 강아지인지를 궁금해할 뿐 별다른 질문은 더 하지 않았다.


대청마루를 마주 보며 일을 하다가 해가 질 시간이 다가온 것 같으면 책을 들고 대청마루에 걸터 앉는다. 그리고 어두워질 때까지 천천히 책장을 넘겨본다. 자연이 만드는 조명에 비추어 책을 읽는 시간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다. 책장이 넘어가는 속도가 해가 내려가는 속도를 못 따라 잡으면 오히려 집중력이 올라간다.


밤이 까맣게 가라 앉으면 풀벌레 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들린다. 날벌레들이 툭툭 떨어지는 마루의 테이블에 앉아 일기를 쓴다. 비슷해서 왠지 더 느리게 가는 것 같은 하루의 반복이 괜히 감사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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