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지영 Nov 01. 2020

나는 내가 될 준비가 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는 아직도 내가 제일 궁금한 걸

오디션 프로그램을 한창 열심히 보던 때가 있었다. 그들이 열정적으로 준비해서 멋진 무대를 짠 해내는 걸 보면 도와준 것 하나 없이도 공짜로 뿌듯해질 수 있었다. 그러다가도 몇 번씩 손가락을 꼽아 그들과 내가 몇 살이나 차이나는지 세어 보곤 했다. 나는 그 나이때 뭘하고 있었지? 그렇게 화면 속의 그들과 나를 의미없이 비교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벼락같은 순간을 만났다. 소름끼치게 잘하는 무대를 볼 때가 아니었다. 프로그램 내내 주목받지 못하던 한 참가자가 한 말 때문이었다. 



모두가 인정하는 참가자의 멋진 무대가 극찬 속에 끝나고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한 참가자가 눈물을 훔치는 모습이 화면에 잡혔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무대에 올라가서도 눈물을 보였다. '앞 참가자랑 너무 비교되서 그냥 포기하고 싶은 걸까?' 왜 자꾸만 우는 것인지 너무나 궁금했던 내 마음을 읽은 것인지 심사위원이었던 유희열이 물었다. 왜 앞 순서 참가자의 무대를 보고, 그리고 본인의 무대를 시작하기 전에 눈물을 보였냐고. 



그러자 그녀는 눈물을 다시 왈칵 쏟아냈다.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꺼낸 말. "저는 잘 하고 싶은데 제가 담을 수 있는게 뭔지 몰랐거든요. 근데 저 친구는 그걸 찾은 것 같아서. 부러운게 아니라 너무 축하해주고 싶었어요." 


축하를 해주고 싶었다니. 예상을 깨는 답변에 잠시 멍해지던 찰나, 유희열이 재차 물었다. "그래서 본인이 좀 초라한 기분이 들고 그랬어요?" 그러자 그가 이번엔 부드러운 미소로 하지만 단단하게 대답했다.


 "아뇨. 초라하지는 않아요. 저도, 찾을 거니까."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축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와 자신을 비교하거나, 지레 포기했다면 절대 할 수 없었을 말. 


'너는 나보다 먼저 찾았구나, 축하해. 나도 곧 찾을 거야. 나를, 나만의 색을.'


타고난 재능보다, 남들과의 비교보다 계속해서 자신 안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게 뭔지 찾아가려고 노력하는 것, 그리고 그런 자세가 재능보다 값진 역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나는 언제부턴가 지레 나만의 무대에서 물러나 바꿀 수 없는 조건, 나이, 기회 같은 것들의 핑계만 대고 있었다. 대체 누굴 위해서?




"너는 정말 경험이 많구나! 책 한 권 써도 되겠다. 그런 것들 찍어 놨다가 유튜브 했으면 대박 났을텐데." 


빈 말로, 지나가는 말로, 짧은 호기심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어왔다. 그때마다 '그러게요.' 맞장구는 쳤지만 나는 하지 않았다. 


시작은 충분히 많이 했다. 책을 만들고 싶다고 생각하고, 수업을 들었다. 하지만 글을 쓰지 않았다. 책을 만들고 싶다고 말하는 친구를 만나 같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책을 만들지 않았다. 그 다짐 이후 1년이 지나 친구는 얼마 전 책을 냈다. 멀리서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완벽한 준비를 핑계 삼던 날들도 지나갔다. 누구도 결코 완벽할 수 없다고 생각해 왔으면서 나는 왜 자꾸 쓰기를 미루는지, 괴로웠던 감정들마저도 이제 무뎌졌다.  


사실 쓰지 않았다는 사실보다 나를 괴롭게 하는 것은 따로 있다. 실은 무엇을 써야할 지 몰랐던 나 자신을 인정하는 것. 안한게 아니라 못한 것이라는 것. 기억의 창고에 가득가득 경험을 쌓아두고 모든게 다 끝난 것처럼 굴었다. 창피했다. 그저 많은 경험을 쌓는 일에만 골몰했지 그걸로 뭘 할 수 있을지는 몰랐다. 그러는 사이 먼지 쌓여버린 추억을 꺼내어 보는게 두려워서, 빛을 잃어버린 그것들을 직접 마주하는게 무서워서 문조차 열어보지 않았다. 


뭐든 일단 쌓다 보면 나의 경험과 이야기에 자연스레 무늬가 생길 거라고 막연히 기대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갑자기 터져나오길 기대하기도 했다. 자신만의 색과 결을 가진 사람들의 반짝이는 결과물만 보고 부러워했다. 정작 한번도 꺼내보지 않은 나의 그 소중하고 특별했던 경험들은 창고 안에서 조용히 빛을 잃어갔고, 어느 순간에는 마지막 빛을 꺼트리고 사라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더 많은 경험이 쌓여갈 수록 더 분명해지는 것은 하나 있었다. 나 스스로 기획하지 않은 경험, 이미 만들어진 경로를 그저 따라 걷는 것은 나에게 아무 것도 남기지 못한다. 직접 몸으로 경험했더라도 심지어 기억조차 남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직접 하지 않은 경험이라도 성찰과 반추를 통해 배울 수 있었다. "우리는 경험에서 배우지 않는다. 우리는 경험에 대한 성찰로부터 배운다." 교육철학자 존 듀이의 말조차도 내가 그 수많은 경험으로부터 제대로 배우지 못한 이유를 성찰했을 때야 비로소 깨달음을 주었다. 


늘 나는 많은 시도를 해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쩌면 그동안 나는 시작조차 하지 않은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나에게 제대로 시작할 기회를 줘야겠다. 

나는 내가 될 준비가 되었다.

작가의 이전글 건강한 고독, 단순한 시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