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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영 Nov 01. 2020

이 시대, 폴리네시아의 사랑

누구에게도 침범당하고 싶지 않지만, 누구든 머물러주길

토니는 이번 여행에서 만난 가장 익스트림한 여행자였다. 


그는 무려 5년째 세계 여행 중이었다. 물론 돈을 버느라 뉴질랜드에서 우핑, 호주에서 워킹홀리데이, 폴리네시아에서 촬영 다이버로 2년을 일하며 나름의 정착을 하긴 했지만 고향인 프랑스를 5년 전 떠난 후 한번도 돌아간 적이 없다는 말이다.


히피들의 바닷가 마을, 고아에서 만난 터라 내가 그를 처음 봤을 때부터 토니는 아랫도리만 입고 활보하고 있었다. 덕분에 등판과 양팔 가득 굵게 둘러진 문신을 또렷하게 볼 수 있었는데 기묘한 모양의 문신에서 풍기는 포스와 달리 토니는 누구를 만나도 길거리에 선 채로 한 시간은 거뜬이 이야기할 수 있는 지구 최고의 수다쟁이였다. 5년 동안 저걸 꾸준히 해왔을 것이란 걸 상상하면 가끔은 존경스러울 정도였다.


여행 중이나 여행을 다녀와서나, 여행에 대해서 사람들이랑 얘기할 때 내가 가장 참을 수 없는 질문은 "어디가 제일 좋았어?"다. 그때마다 나는 "다 매력이 달라서 하나만 꼽을 수가 없어." 라며 대충 얼버무리고 다른 주제로 넘어가려고 한다. 그런데 토니는 그 귀찮고 식상하고 애매한 질문에 늘 싱글 웃으며  "폴리네시아!" 라고 외치고는 프랑스 액센트가 가득 담긴 영어로 '오우 잇 이즈 소오오 뷰리풀' 로 시작되는 폴리네시아 찬양을 매번 정성스럽게 늘어놓았다.


토니는 그 곳에 2년을 살았지만 또 기회가 생긴다면 다른 세계를 더 보는 대신 그곳에 살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정말로 돌고래 돌보기 일을 새롭게 제안받아 몇 개월 후 폴리네시아 바다에서 일할 예정이다.) 하지만 그 바다 색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몇 번을 들었어도 가봐야 겠다는 생각까지는 들지 않았다. 새로운 곳에 도착할 때마다 새롭게 감탄하며, 세상에 아름다운 섬과 바다가 끝이 없다는 것을 알아가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날 밤, 폴리네시아는 우리 모두의 '넥스트 핫 플레이스'가 되었다. 다양한 온 여행자들이 모이다 보면 연애 얘기는 언제나 떼어놓을 수 없는 글로벌 핫이슈이기 마련. 그날 밤은 인도에서 온 마두의 팜므파탈적인 매력이 불러일으킨 치명적인 운명의 러브참사로 한껏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던 중이었다.


"폴리네시아에서는 연애를 어떻게 시작하는 지 알아?"


달아오른 분위기 속에서 토니가 조용히 폴리네시아 썰을 풀기 시작했다.


"어떤 여자가 맘에 들면 남자가 밤에 그의 방에 조용히 숨어들어가는 거야. 그리고 성공하면 그날 밤을 함께 보내는 거지. 그 뒤에도 여러 번 연속해서 함께 밤을 보내고 나면 나중엔 그게 연애가 되는 거야."


여기까지 들은 우리는 모두 경악했다.

"뭐? 그거 강간 아니야?"


"아니야. 폴리네시아는 그 어떤 나라보다 평등하게 관계를 맺는다고. 낮에는 어떤 유혹도 없어. 단지 밤이 오면 방문의 빗장을 슬쩍 풀어두는 거지. 여자들은 찾아온 남자가 맘에 안들면 당연히 거절해도 돼. 그럼 남자는 순순히 돌아가는 거고. "


"그럼 여자는 맘에 드는 남자가 올 때까지 마냥 기다리기만 해야하는 거야?"


"아냐, 여자도 마찬가지로 맘에 드는 남자가 있으면 그 사람 방에 갈 수 있어. 모두들 다른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하게 조용히 찾아가는 거지. 혹시 거절당해도 창피할 일도 없고 말야."


"으, 밤마다 문 꼭꼭 닫아두고 자야겠다. 원치 않는 어색한 상황을 피하려면."

라고 몸서리를 치면서도 우리는 기승전결의 결만 있는 사랑의 정글, 폴리네시아 이야기 속으로 순식간에 빨려들어갔다.


에메랄드색 바다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섬나라 폴리네시아는 낮에는 마냥 평화로운 파라다이스 같은데 밤에는 정글과 같이 변했다. 모두가 각자의 사랑을 얻기 위해 투쟁하는 사랑의 정글.


여기까지는 좋다. 청춘이 뜨거운 것이 무슨 죄겠는가. 문제는 이 섬나라의 전통적 주거 관습과 불꽃같은 연애 관습이 동시에 존재하면서 벌어진다. 폴리네시아는 전통적으로 방사형으로 구역이 나누어진 섬의 지형 속에서 하나의 가족이 하나의 길을 따라 나란히 집을 짓고 살아간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가까운 친척들이 아랫길, 윗길에 모여서 하나의 마을단위를 이루게 된다.  


그런데 밤 사이 이루어지는 스리슬쩍 합방은 뜨거운 청춘남녀만 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가족이 있는 남자와 여자도 밤에 다른 남자와 여자의 방으로 찾아간다는 것이다. 거기다 친인척들이 주로 가까이 살기 때문에 우리로 치면 용서받지 못할 불륜이 남남도 아닌 친척, 심지어 같은 가족 사이에서도 일어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낮의 평화로운 파라다이스는 모든 구설을 묻어버린다. 낮에는 같이 일하고 아기를 돌보던 남편이나 아내가 밤에는 다른 애인을 만나러 간다는 걸 서로 알고 있다. 심지어 가족보다 애인과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다고 한다. 모두가 공공연히 바람을 피우며 사이좋게 지낸다는 이 곳. 아아, 그곳은 그야말로 사랑의 정글이었던 것이다.


이 어마어마한 이야기를 들으며 폴리가미의 폴리가 폴리네시아의 앞 글자를 딴 것인가 잠시 생각했다. '아니, 그럴거면 대체 결혼은 왜 하는 거지?' 하는 의문이 아주 강하게 들었지만 어쩌면 저런 형태의 연애관계가 어쩌면 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쓸리지 않고, 사회적 관계에 얽매이지도 않고, 오늘 밤 내가 누구와 함께 하고 싶은지만 생각하는 것.


"토니, 그럼 너는 외국인이라서 사람들 관심 많이 받았겠다. 막 밤에 여러 명이 한꺼번에 찾아와서 곤란스러웠던 적 없었어? 어땠어?"


"무슨. 한 번도 그런 일 없었어. 나는 문 꽁꽁 잠가놓고 잤으니까. 나는 그때 여자친구가 있었거든."


모건이 진심으로 아쉬워하면서 말했다.

"에이, 뭐야 아쉽다. 그런 뜨거운 섬에 있었으면서. 그 섬 여자들한테 너무한 거 아냐?"




문을 꽁꽁 닫아 잠근 밤, 폴리네시아의 사랑을 떠올린다. 


이 밤, 나를 떨리게 하는 그의 방문이 잠겨있을까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기는 뜨거운 남과 녀가 있겠지. 그 곳에서라면 썸 때문에 오래 마음앓이 할 일도 없을 테고. 밤은 계속되고 폭풍같은 밤이 지나면 아침은 평화롭게 찾아오겠지. 간밤에 어떤 누가 새로운 사랑을 얻었고, 그것이 누구의 맘을 깨뜨렸든, 누가 거절을 당했건 그들은 개의치 않고 다음 날 또 사랑을 찾아나설 것이다.


누구도 나를 침범하길 바라지 않지만, 누군가는 닫아건 문조차 조용히 열고 들어와 머물러 주길 바라는 모순적인 마음이 일렁이는 밤에는 그런 곳이 괜스레 가고 싶어진다. 


단지 밤이 찾아와도 문을 걸어두지 않는 것. 
그것이 새로운 인연에 대한 조용한 초대가 될 수 있는 곳. 


모든 것이 너무 조심스러워서 밋밋해져 버린 요즘, 이 시대에는 어쩌면 폴리네시아의 사랑이 필요한 게 아닌가 생각하다 오늘도 혼자 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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