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서 그런 걸 발견할 땐 소스라치게 싫었는데 말야. 내 한계를 내가 제일 잘 아니까, 조금이라도 아는 척할 때의 내가 스스로 초라해서 못견디겠는 거야. 그런데 내 앞에서 이런저런 시인, 사상가의 이름과 이론을 딱히 맥락도 없이 늘어놓는 너의 모습이 마냥 귀여웠어.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치긴 했지만 사실 마음 속에선 풉, 하는 미소가 걸려있었다는 걸 너는 몰랐겠지.
다른 허영하고는 다르게 거기엔 순수한 구석이 있어서. 자신에게만 몰입하는 배타적인 욕망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있는 사람이 더 알고 싶어 부리는 호기로움 같은 게 느껴져서. 나는 그런 너를 더 알고 싶어졌어.
'어쩌면 난 나의 그런 구석을 싫어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켠 깊숙이에서는 좋아하고 있었구나'
새삼 생각했어. 네 덕에 안심할 수 있었어. 내가 나를 싫어하지 않게 해주는 사람이라 고마웠어.
예전에 좋아했던 사람을 오랜만에 만났어.
참 변한게 없더라. 또 한참을 예전처럼 지적허영 가득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 너를 떠올렸어.
'아 그렇지, 내가 이런 사람들을 좋아했었지.'
너랑 걸었던 수많은 길과 그 풍경들도 같이 떠올랐어. 효자동을 걸으면서는 효자동이 왜 효자동이 되었는지에 대한 토론을 했지. 그 유래를 이모저모 따지면서 참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늘어놓았지. 어쩌면 그 결론도 없는 딱히 로맨틱하지도 않은 대화를, 그저 길게 늘어놓기 위해 우리는 그렇게 오래 걸었는지도 몰라.
나의 허영 속에 완벽했던 너.
그리고 너의 허영 속의 나.
우리의 허영이 서로를 끝없는 대화로 이끌어 놓았던 걷기 좋은 계절이었지.
우리집 책장에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이라는 책이 꽂혀있는 거 너는 봤었을까?
그 책조차 나는 읽지 않았지만 읽지 않더라도 가지고 있으면 괜히 든든한 기분이었어. 하지만 한 세계를 안다는건 너무 거대한 일이라 때로 게을러지기도 하는 것 같아. 새로운 책이 궁금해서 자꾸만 사다가 꽂아두고 미처 다 읽지도 못한 책은 어느새 눈에서 멀어지고 말지. 읽히지 않는 책이 된다는 건 퍽 쓸쓸한 일일거야.
다음에 누군가를 만난다면 너를 위한 단 하나의 책장을 가진, 그런 사람을 만나.
한 권의 책을 얼마나 다양하게 읽어내려갈 수 있는지, 그래서 그 이야기가 영영 끝나지 않을 수 있다는 걸 몸으로 깨달은 사람. 나처럼 머리로만 깨달은 사람 말고. 더 예쁘게 더 자주 들여다보고 읽어주지 못해 미안했어. 책장에 꽂아만 두고.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도 읽지 않는 주제에 말야.
내가, 좋은 사람만 좋아한다고 했었던 거 기억나?
알면 알 수록 더 좋은 사람이어서, 나에게 더 좋은 사람이려고 노력해줘서 고마웠어. 니 옆에 있으면 나도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것 같았어. 나에 대한 허영을 멈추지 않아준 네덕에. 가끔은 니가 보는 내가 내가 보는 나보다 커보여서 불안하기도 했지만. 내가 좋아하는, 혹은 나도 몰랐던 내 모습을 발견하고 좋아해줘서 행복했어.
또 언젠가 말했듯. 우리는 자신에게 맞는 행복이 뭔지 아는 사람들이니까. 앞으로도 그때그때의 우리에게 잘 맞는 행복을 찾아 나서겠지? 이제 그건 내가 해줄 수 없는 거니까, 나도 앞으로 너의 행복을 찾는 여정을 늘 응원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