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지영 Aug 25. 2021

방과 밤과 잠을 공유하는데 거리낌이 없는 나의 여자들



떠돌이 생활을 자주 하던 나에게는 사실 믿을 구석이 있었다.


# 질척대는 여름 밤


남미 여행 후 잔고 0원에 수렴하던 시절에도, 인도 여행하고 혈혈단신으로 서울에 돌아왔을 때도 나는 루리네 집에서 먹고 자며 새로운 방을 구했다. 까맣고 꾀죄죄한 몰골로 캐리어 하나 툭 끌고 와도 언제나 마음 편한 방이었다. 신세를 지는 사람이 더 편하게 널부러져 있는 것이 자연스러운 재밌고 요상한 날들이었다.


그러다가 우리는 같이 살 투룸을 구했다. 이사 기간이 맞지 않아 부동산 창고에 살림살이를 우겨넣고 한 달 동안 집주인이 마련해 준 옥탑 단칸방에서 지내야 했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되는 환경이었다. 화장실이 중간에 턱 놓여 부엌과 방을 구분해주는 요상한 구조의 자그만한 옥탑방. 현관문 바로 앞에 있는 문을 열면 갑작스레 우리 방의 몇배는 되는 운동장 같은 옥상이 펼쳐졌다. 루리의 킹사이즈 침대는 부동산 창고에 비스듬히 세워져있고, 어디서 부동산 사장님이 마련해온 싱글 매트리스 하나만 방에 깔아두고 둘이서 복작복작 잘도 지냈다. 루리는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면서 온갖 부산을 떠는 나를 참아줄 수 있는 세상에 둘도 없는 룸메이트였다. 새벽 3시에 탈색을 한답시고 코를 찌르는 냄새를 풍길 때는 좀 째려보긴 했지만.


세간도 없이 한달을 견디고 드디어 각자의 방이 생겼지만 뜨거운 여름에 에어컨이 있는 큰 방을 나에게 양보한 루리는 결국 매일 밤 내 침대로 올 수 밖에 없었다. 옥탑방 시절보다 침대는 넓어졌지만, 찐득한 여름 내내 우리는 그렇게 나란히 포개어 잠을 잤다. 그렇게 얼마나 많은 날. 나는 방과 잠을 루리에게 빚졌는지 모른다.


지금은 독일에서 공부하고 있는 루리가 가끔 서울에 올 때마다 나는 우리 집에서 자고 가라고 질척거린다. 그런다고 갚아질 리 없는 빚 때문이 아니라 짧은 시간에도 가득 쌓인 얘기들을 조잘조잘 대다가 잠들고 싶어서.


다시, 여름밤. 일과를 마치고 돌아왔는데 근 일년만에 본 루리가 나의 집에서 나를 맞아준다. 그렇게 여느 밤처럼 함께 같은 방에서 잠을 자는 것이 너무 익숙해서 새삼 우리의 지난 밤들을 톺아본다.


# 다정은 힘이요


어젯밤 나는 소정이 덕에 황제가 되었다. 막 나만의 집으로 이사했던 무렵 마침 머물 곳이 필요했던 소정과 잠시 함께 살았었다. 집에 돌아오면 항상 거실에는 막 시작한 쇼핑몰 관련 짐과 포장 박스 사이에서 분주한 소정의 뒷모습이 있었다. 한달 정도 됐을까, 소정은 집을 구해서 나갔다. 창업 3년째, 산전수전 겪으며 멋진 대표님으로 성장한 소정이는 아직도 나를 만날 때마다 몇년 전 퇴사하고 창업을 시작하던 시절을 얘기하면서 고맙다고 한다. 그후로 소정은 만날 때마다 자주 비싸고 맛있는 것을 사주거나 선물을 건네곤 했다. 사업이 잘 풀리나보다 속없이 기뻐하며 덥썩덥썩 받아 먹다가, 자꾸 나만 받는 것 같아 미안해지려던 참이었는데 어제는 황제 마사지까지 데려가주는 것이 아닌가!


소정의 속마음을 알게 된 건 그 이후의 이야기였다. 그날은 수진에게 일어난 힘든 일을 듣고 함께 엉엉 운 날이었다. 소정의 소개로 친해진 수진은 사실 그간 소정에게 들은 이야기 덕에 나에게 일찌감치 마음을 열었다고 했다. 당시에 소정은 더 신세질 수 없어서 오히려 나에게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경제적으로 힘든 시기였다고 했다. 그리고 방을 구해 나갈 때는 내가 이사비라고 돈을 자신의 손에 쥐어줬다는 얘기를 몇 번이나 했다고 했다. 너무 고맙고 다정한 사람이라고. 나도 잊고 있던 일들이었다. 하지만 그런 작은 일들도 잊지 않고 기억하고 계속해서 고마워해주는 소정 덕에, 소정이 기억해주는 예전의 나에게 나도 감사해졌다. 소정에게 다정해주어서.


이렇게 서로 고마워해주는 마음이
우리를 앞으로도 계속 서로에게 다정하게 하겠지.


앞으로 언제든 찾아올 힘든 밤에 믿을 구석이 있다는 건 참 든든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 두 번의 밤과 한 줄의 카드


"거침없이, 즐겁게, 따뜻하게 살며
나에게 영감이 되어주는 지영에게"


처음 알게 되자마자 두 번의 밤을 함께 보낸 예지가 생일에 맞추어 책 한 권과 메시지 카드를 보내왔다. 짧지만 빼곡하게 녹아있는 진심이 따스하게 스며든다. 자신이 이토록 다정하다는 사실이 본인만 어색한 것 같은 예지와는 '긴' 시간을 '많이' 공유하지는 않았지만 무언가 애틋하게 연결된 느낌이다.


서로 알지 못했던 시간들에도 겹쳐있는 조각들을 애정을 가지고 발견하려는 노력 때문에.

앞으로도 느슨하더라도 연결되어있다는 감각을 공유하고 싶다.


그게 우리가 새롭게 알게 된 우정이겠지.


# 붕대감기


예지가 선물해 준 책을 다 읽고, 담아두고 싶은 문장들의 필사도 다 마치고 다른 친구에게 선물했다. 이사가 잦은 유년기를 보낸 나에겐 가장 오래된 친구에게. 알고 지낸 지 이십년. 그 사이 벌써 애기가 둘인 '어머니'가 된 나래가 두 번째 복직을 앞두고 만나자고 연락이 왔다. 나래랑 점심을 먹기로 약속하자마자 이 책이 떠올랐다.


어쩐지 여성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책을 읽을 때면 가끔은 나의 어머니보다 나래가 먼저 떠오른다. 비슷한 경로와 배경 속에서, 어쩌면 나도 비슷하게 그려냈을 일상을 성실하게 사랑으로 채워내고 있는 모습을 떠올려 본다. 말로는 다 전하지 못하는 공감과 사랑과 위로를, 내가 받았던 따뜻한 마음에 얹어서 전해본다.





#. 느슨하고 따뜻한 마음들

느슨한 시간이 쌓아온 인연들에 정말이지 감사함을 느끼는 요즘이다.

하릴 없는 시간을 기꺼이 같이 보내고, 반복되는 고민이나 흩어질 결심이라도 부끄러움 없이 공유할 수 있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이 봄 날씨 만큼이나 감사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