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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페미니스트거든요. 근데 지금 너무 반페미니즘적인 콘텐츠를 만들고 있어요. 이게 저를 너무 힘들게 해요. 제가 도대체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어요."
반년 전 안면윤곽수술을 한 그녀는 타 부서 팀원이다. 이 회사에서 내게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칭한 두 번째다. 잠시 바라본다. 첫 번째도 두 번째도 그녀들은 하나같이 몹시 날씬하고 예쁘다. 톱 여배우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다. 쿵쾅쿵쾅이라니, 당치 않다.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다. 이 말은 좀 어색하다. 여성으로 태어났기에 차별적인 대우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어떤 여성이 자신을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페미니스트이겠지만 원하는 바를 제대로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으며, 또한 이를 표현하여 다듬은 적이 없다고 말하는 것도 다소 구차하고 무책임하여 구리다. 나의 정체성에 대해 제대로 생각해 본 적도 없고, 또한 표현해 볼 생각조차 없었다니.
근데 그게 나였다. 나는 생활인으로서 내가 여성이라는 사실을 자주 잊었고 때때로 남성에 동화했으며 자주 체기를 느꼈다.
첫 번째 페미니스트는 내부서 팀원이다. 외근 갔던 그녀는 방송사 PD와 싸웠다. 함께 점심 식사를 하다가 그 PD가 "요즘 여직원들 문제"라는 이야기로 포문을 열었다고 한다. "별 것도 아닌 일로 따지고 드는 통에 밥도 술도 같이 못 먹겠다", "어쩌다 농담하나 할라치면 발끈하고 일을 크게 만들며, 니 거 내 거 따지는 것만 잘하지 막상 일도 잘 못한다"라고 했단다.
내 팀원은 "불쾌한 얘기인지도 모르고 식사 시간을 망치는 이들이 시대착오적인 마인드로 일은 제대로 하겠냐"며 되받아쳤고, PD는 내게 전화를 했다. "어디서 그런 기본이 안된 애를 보냈냐"며.
그녀가 대체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꼰대들 거지 같은 말쯤 태연하게 넘길 때도 되지 않았나. 일을 그렇게 좀 똑똑하게 해 보지. 왜 늘 자기 싫은 것만 칼같이 방어하는지. 일을 그르친 그녀에게 화가 난다.
혼란스럽다. 나는 여성혐오자인가. 뭐긴 뭐야. 직장 상사지. 나는 상황에 따라 옷을 바꿔 입었다. 소개팅에 나가서는 내가 돈을 내는 게 편했지만, 남편은 나보다 돈을 잘 벌길 바랐다. 꾸밈노동에 낭비하는 시간이 아깝지만 늘 예쁜 여자가 되고 싶었다.
아름다움을 어떻게 정의하는가. 미디어의 역할은.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패션, 미용성형, 안티에이징 트렌드는 어떻게 할 것인가. 환경파괴적인 기업은 어떤가. 위험천만한 생산공정은 어떤가. 너무 복잡하다. 나로선 풀어낼 수 없다. 무력해진다.
나는 여성이다. 어쩌다 보니 미용성형산업에 종사하게 되었다. 우리는 성형수술을 했다. 성형수술이 반페미니즘적인지는 잘 모르겠다. 이 산업이 만들어내는 콘텐츠들이 상당 부분 반페미니즘적인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다른 산업에 종사할 때도 회의감은 있었다. 그때도 나는 열심히 일했고, 내 일을 사랑했다. 애초에 일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더 좋은 세상을 꿈꾸지 않았다면 느낄 수 없을 감정이다.
설득업에 종사하며 타인들이 우리 제품과 서비스를 구매하도록 다양한 일을 수행한다. 때때로 나의 의견과 다른 일을 타의로 할 때도 있다.
하지만 내가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일을 그저 행하진 않는다. 그때야말로 여성 직업인으로서 자존심이 꿈틀 한다. 인류에 시대에 반하지 않는다고 생각될 때까지, 적어도 내 생각에 근접해질 때까지 수정하고, 이를 관철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한다.
절반은 내 패배다.
그런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면 우리 같은 사람들은 필요 없다. 우리의 가치는, 얼마나 잘 기업가의 생각을 구현해내는가에 있지 않다. 더 좋은 세상이 되도록 수정하고 의견을 내는일, 그것에 내 일의 가치를 두며, 그렇게 나의 정체성을 통합한다,
언제까지 나는 스스로가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말하게 될까. 내가 여성임을 자각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가 될 때까지, 나는 여성이라는 것을 잊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