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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타이 Oct 23. 2023

점순의 딸 P

고모가 말했다.

“혜인이 니 앞에서 할 소리는 아니다만 너네 엄마처럼 부모형제보다 남편이 많은 여자가 무슨 엄마니? 너를 이렇게 고생시키고“


고모가 내게 못 할 소리라고 할 땐 고모가 가장 하고 싶은 말이 시작된다는 뜻이다. 오죽 저 말이 하고 싶으면 못 할 소리인지 안다면서도 할까.


엄마에게 부모형제가 없다는 것, 남편이 많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남편이 많다고 하여 엄마가 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아빠도 형제자매도 없는 내게는 더욱 그렇다.


“우리 엄마가 무슨 남편이 많냐. 지금 이혼 소송 중인 거 딱 한 개거든 “


고모와 엄마의 남편에 대해 얘기할 땐 사람을 세는 단위 대신 물건을 세는 단위를 사용한다. 한 개 두 개 세 개 네 개. 고모는 3년 전에 죽은 제 남동생에게도 한결같다.


“한 개도 모자라서 네 개씩이나 분질러 먹을걸 알았으면 내가 너네 엄마 그렇게 곱게 보내지도 않았어 “


엄마의 전남편은 3명. 그리고 네 개가 될 이는 지금 소송 중이다. 고모는 엄마와 아빠의 이혼이 엄마 문제라고 은근쓸쩍 떠넘긴다.


“엄마는 그냥 연애만 할 수는 없어? 어차피 얼마 같이 살지도 못할 거 왜 자꾸 결혼을 해서 바쁜 대한민국 공무원들 일거리 만들고 그래“


“혜인아. 엄마는. 진짜였어“


그렇다. 우리 점순 씨는 진짜다. 내가 안다.


엄마는 모두를 다 진심으로 사랑해서 잠자리를 함께 하고 살림을 나눠 쓴 모든 남자와 혼인신고를 했다. 마치 처음처럼.


진짜 첫 남자인 아빠와는 내가 여섯 살 때 동네 아줌마와 포개 누운 걸 본 이후 헤어졌다. 아빠는 엄마 발 앞에 무릎 꿇고 빌었지만 엄마는 용서도 하지 않고 앓지도 않고 고모의 독한 년 소리에도 상대하지 않고 그저 나만 챙겨 이혼했다.


이혼을 했지만 딱히 갈 곳이 없어 원래 살 던 곳에서 한 길 건넌 곳으로 이사를 갔다. 엄마가 일을 하러 나가면 나는 슬그머니 길을 건너 고모네 집에 갔다.


“고모 나 밥 줘”

“너네 엄마는 너 밥도 안 지어주고 나갔니?”

“응. 엄마 바빠”

“뭐 그리 바빠서 하나뿐인 제 가족도 안 챙긴다니?”

“맨날 아저씨들이 찾아와서 바빠“

“뭐? 어떤 아저씨들이?“


파르르 떠는 고모 앞에서 수저를 바삐 움직이며 밥을 먹고 나면 졸음이 밀려왔다.


“죄송해요. 애가 어려서 자꾸 이리로 오네요”

“너는 이혼한 지 얼마나 됐다고 감히 코앞에서 다른 남자들을 만나?”


이혼녀가 된 엄마에게 구애하는 남자들은 다 아는 남자들이었다. 엄마 아빠가 결혼하기 전부터 엄마를 좋아해 왔다는 아빠의 친구부터, 동네 아저씨들, 엄마 친구의 남편들.


엄마는 아는 남자들은 모두 물리치고 그 도시 사람이 아니었던 모르는 남자를 만났다. 출산 중에 딸을 남기고 그만 와이프가 죽어버렸다는 학교 선생님이다. 재혼 후 그의 전근과 함께 소도시를 떠났다. 물론 나를 데리고.


어린 내가 살던 동네를 떠나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소문난 미남미녀 잉꼬부부였던 부모님의 이혼소식, 그리고 그에 얽힌 아빠의 추문, 엄마를 향한 너저분한 구애와 동네 아줌마들의 수군거림이 어쩐지 서러울 때쯤이라 동네를 떠나올 때는 시원하기까지 했다.


새아빠와 언니는 조용한 사람들이었다. 언니는 때때로 내가 좋아하는 엘리제를 위하여를 피아노로 쳐주기도 했다.


얌전했던 새아빠가 술을 마시고 엄마와 싸우기 시작한 건 내가 중학생, 언니가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다. 엄마가 아빠 학교의 동료와 바람을 피웠다는 거다.


엄마는 아니라고 항변했으나 그 학교 동료가 자신이 엄마를 좋아한 게 맞다고 새아빠에게 말하는 것으로 새아빠는 더 악화됐다.


엄마의 결혼이야기는 하나같이 비슷해서 놀랍게도 4명 중 내 친부를 제외한 3명이 모두 의처증으로 엄마를 괴롭혔고 엄마는 그렇게 4번의 실패를 했다. 아니 하는 중이다.


자꾸 새아빠가 바뀌는 판이니 나같이 눈칫밥에 단련된 아이도 지치기 마련이다. 한 번은 친부가 사는 집으로 불러졌다.  아빠가 술 냄새를 풍기며 말했다. “너 아빠랑 살자. 너도 모르는 아저씨랑 살기 싫지?“


고모라면 모를까. 아저씨들보다 아빠랑 둘이 살기가 더 싫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3년 뒤 아빠가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어쩌면 아빠와 부녀의 정을 한 번은 나눠볼 수 있을까.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가끔 그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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