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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타이 Nov 08. 2023

환상의 섬, 그리고 환장의 바보

제가 체험해 보았습니다 우울증 그리고 폭세틴

그러니까 저는 피해망상과 극도의 업무 스트레스로 인한 우울증이 의심되어 정신과를 갔고, 그렇게 정신과에서 폭세틴 10mg 일주일치를 처방받아서 왔다고 얘기했어요.


아 폭세틴 이야기는 처음 했나요? 미안해요. 제정신상태가 멀쩡치 않다는 걸로도 양해가 안되는군요.


그러니까 전 지난 토요일에 일주일치 항우울제를 타왔어요. 그런데 생각이 나더라고요. 중간에 난 여행을 가야 하고, 여행 중간에 약이 똑떨어진다는 사실이.


아직 약을 먹어본 것은 아니지만 네이버에 검색해 봤더니 어떤 사람은 약을 먹기 시작하니 자살 충동이 들기도 했다고 하더라고요. 저도 나름 산전수전을 겪었으나 스스로 목숨을 끊을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데 혹시 저도 그런 충동을 느끼면 어떡하죠? 너무 무섭더군요. 저 이러다가 타지에서 목숨을 끊는, 그런 뉴스에 나오는 사람이 될 수도 있는 거잖아요.


병원에 문의를 했습니다. 별문제 없다고 하더라고요. 하긴 10mg은 굉장히 저용량이라... 크게 문제가 없을 것도 같습니다.


투약 첫째 날, 그러니까 일요일은 집에서 머물렀습니다. 어제보다는 눈물이 덜 나는 것 같기도 합니다만, 아직은 눈물이 납니다. 그저 신세가 처량해져서 울었습니다. 자기 연민에 젖고 나니 몸이 나른해지는 것도 같아요. IMF때 부모님이 자주 싸우셨는데, 그때 정말 많이 잤거든요. 고 3인데 하루에 20시간은 잔 것 같아요. 그때만큼 잤습니다. 우울하면 잠을 오래 잔다는 사실을 오랜만에 떠올렸어요. 잊고 살았더라고요.


경쟁에서 자빠져 버린 제가 너무 한심하네요. 고작 이 정도 업무 스트레스에 나자빠지다니. 다이어트고 운동이고 모닝챌린지고 뭐고 다 모르겠어요. 제 루틴을 모두 놓아버렸습니다.

사실 이달은 저에게 너무 바쁜 달이지만, 쉬지 않으면 큰일 날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어요. 때마침 아는 다이빙샵에서 투어를 간다기에 꼭 끼워달라고 했습니다. 사실 다이빙투어보다는 여행 가서 현지 샵에서 이것저것 알아보고, 비교해서 데이투어를 신청하는 걸 선호하는데요, 인생에 이렇게 별생각 없이 돈 흥청망청 써버리는 때도 있어도 되겠다 싶어요. 그래봤자 뭐 일이백만원 정도겠지요. 구조비용으로 그 정도 못 쓰겠어요.


투약 둘째 날, 투약 후 첫 출근입니다. 누군가 저에게 당신 폭세틴 먹지 물어볼 것만 같습니다.


갑자기 후배가 말을 걸어옵니다. 지난주에 저랑 말다툼을 한 후배인데요, 지난주까지만 해도 자신이 잘못한 게 없다며 방방 뛰던 후배인데 가족들에게 얘기했다가 혼이 났다네요. 저에게 미안하다고 합니다. 사실 잊고 있었는데요, 아무래도 얘도 제 스트레스의 원인 중 하나였던 것 같네요.


투약 셋째 날, 두 번째 날입니다. 정말 한결 나아진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어제 사과받은데 이어 여기저기서 갑자기 따뜻한 위로의 말을 건넵니다. 아무래도 제가 미친 것이 소문난 게 틀림없습니다.


투약 넷째 날, 드디어 출국하는 날입니다. 별로 흥이 나진 않습니다만, 팀원들에게 휴대전화를 5년 반 만에 끌 것이라 말하는 것으로 제 여행은 비로소 시작되었습니다. 여행이라기보다는 휴식이네요. 5년 반동안 전화를 꺼본 적이 없다니 놀랍습니다. 가족들은 제가 허구한 날 연락두절되는 사람이라고 알고 있는데 말이에요. 우리는 얼마나 많이 본성대로 못 살고 있나요. 먹고살기 참 힘듭니다.


투약 다섯째 날, 룸메이트는 열 살이나 어린 동생입니다. 내가 화장실에 들어가면 그녀는 슬그머니 밖으로 나갑니다. 배려가 몸에 밴 아가씨인가 보네요.


투약 여섯째 날, 하루에 세 번씩 바다에 들어가서 세 시간씩 잠수를 합니다. 적막한 바닷속에서 숨소리에만 집중하고 있는, 그저 내가 얼마만큼의 공기를 먹어 얼마큼 떠오르나에 집중하는 이 시간이 좋아집니다.


투약 일곱째 날, 어느덧 벌써 마지막 알약입니다. 오늘 아침에도 룸메이트의 눈치를 보며 알약을 삼킵니다. 약효가 사라진 후 내가 갑자기 확 미쳐버리진 않을까 걱정됩니다. 오늘은 같이 여행온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명랑했던 건 아닌가 싶습니다. 모두가 내 연인 식의 여왕벌처럼 구는 거 안 좋아하는데, 나이가 많으니 다 용서되겠지요?


약이 없는 여행 마지막 이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사실 맥주 두 잔을 마시고 울어버릴까 봐 많이 걱정했거든요. 근데 울기는커녕, 모든 감정에 너무 무뎌지고 그냥 멍하네요.


어쨌거나 폭세틴 일주일치가 끝났습니다. 여행도 끝이 났고요,

이제 다시 스트레스가 가득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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