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망상에서 벗어난 현실은 작은 지옥
자 제가 어디까지 말했지요? 기억을 못 하시네. 제대로 듣고 있는 거 맞아요?
자 다시 한번 얘기해 줄게요. 이제 까먹으면 안 돼요.
저는 무단으로 제 이메일을 누군가 들여다본다는 것을 모르고, 제가 미쳐서 그런 상상을 한다고, 이게 바로 업무 스트레스로 인한 피해망상이라고 여기고 정신과를 방문했습니다.
저는 제 가진 모든 힘을 다해 일을 했을 뿐인데 결국 미쳐버렸다는 것이, 또 이제 제대로 망가져서 그 일마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 앞으로의 생계가 너무나 걱정되어 많이 울었습니다. 병원에선 저에게 항우울제 폭세틴을 처방했고, 저는 휴가를 내고 5년 반 만에 전화기를 끄고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자 그리고 돌아왔더니 이메일을 실제로 누군가 들여다본 것이 맞다는 업무시스템 관리 운영회사의 진단 메일이 와있었고, 저는 어쨌거나 이미 예약해 두었기 때문에 정신과에 2번째 방문을 했습니다.
"선생님, 저 미치지 않았대요. 누가 제 이메일 진짜 훔쳐봤대요. 와 진짜 뭐 이런 일이 다 있어요?"
"아 정말 다행이네요. 그런데 누가 그랬대요?"
아 생각지도 못했던 질문입니다. 그러네요. 정말 그런 일이 있었다면, 이제 범인이 누구인지를 찾는 것이 수순이겠네요. 저는 온전히 제가 미치지 않았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기쁜 마음으로 이를 받아들였는데, 미치지 않았으니, 이제 저는 저를 몰래 숨어 괴롭힌 그 자를 찾아야 했습니다.
"누구일 것 같아요?"
"글쎄요. 업무메일이라는 것이 정말 재미없고 짜치는 내용들이 태반인데 무슨 회사 기밀을 빼가려고 본 것도 아닌 것 같고, 그저 제가 일 잘하고 있나 궁금한 제 보스가 아닐까요?"
"에이 아니죠. 아마도 아랫사람일 거예요"
제 팀원요? 지난 5년 반동안 제가 모든 흉허물을 감싸주고, 물심양면으로 도와주고, 진심으로 대했던 제 팀원들 중 하나라니요. 현재 함께 일하는 10명의 팀원을 하나하나 생각하다 진이 빠져 생각하길 그만두었어요. 제 지난 5년 반을 제 스스로 부정해야 하는 것이더라고요.
저 정말 열심히 살았거든요. 회사라는 건 그렇잖아요. 누군가 나자빠지기 전에는 절대 충원해주지 않죠. 퇴사자는 퇴사자대로 한 달 전 노티스 후 인수인계 기간을 채우면 빨리 나가고 싶어 하고, 인수인계는 1~2주나 이루어지면 다행일까요. 그나마도 전임자가 퇴사하기 전에 빨리 충원이 되는 경우에 한한 거죠. 그럼 그 책임들은 나머지 사람들이 나누어가져야 하잖아요. 이력서 검토와 면접은요? 팀 내 허리 역할을 하는 과장 두 명이 동시에 출산과 육아로 자리를 비우게 되면서 갑자기 열 명의 아기를 키우는 신세가 되었어요.
근데 말하다 보니 구차하네요. 걍 지나간 일은 지나간 대로 흘러가게 둘래요. 생각해서 뭐해요. 누가 그랬나 보죠.
정신과 원장님은 혼란스러운 질문만 던지고는 제가 작성해 간 '문장완성검사'를 들여다봤어요.
"부모의 방임 속에 상의할 곳 없이 모든 문제를 혼자 해결하며 살아왔네요."
"네, 어쩌다 보니 그리 됐네요."
"경제적인 문제에 굉장히 큰 불안을 가지고 있어요."
"네, 저도 제가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현재 제 경제 상황은 객관적으로 좋은 편이거든요"
"원래 가난을 경험했던 분들이 그래요. 가난에서 벗어나고도 끊임없이 괴로워하죠. 해맑은 금수저처럼 절대 될 수 없어요. 많은 분들이 가난을 숨기죠."
"제가 가난했던 과거를 숨겼을까요?"
생각해 보니 어느 순간부터 그랬던 것 같기도 하네요.
30대까지만 해도 하루에 서너 시간씩 자면서 아르바이트해 대학을 졸업한 저 자신이 너무 대견해서 제 작은 성취를 자랑했지만, 어느 순간 보니 이 세상에선 자수성가한 사람보다도 원래 부유하게 태어나서 더 많은 부를 축적한 사람이 칭송받거나, 그저 부가 많을수록 사랑받는 것 같긴 하더군요. 경제적 궁핍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 썼던 제 분투기 같은 건 어느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아서 어느 순간 입을 다물었을 뿐이에요. 입만 다물고 있으면 저도 제법 곱게 자란 딸내미 같거든요.
"그냥 현실을 인정해 버리세요. 그래 금수저야, 너 부유한 집안에 태어나서 한없이 티 없이 맑아서 좋겠다. 역시 사람은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야 해. 이렇게 말이에요."
크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제가 처한 경제적인 상황에 많은 콤플렉스를 느끼며 살아왔던 모양이에요. 의사 선생님의 말이 여러 날 동안 떠나지 않고 제 주위를 맴돌고 있네요. 이 얘기는 나중에 또 할게요.
"약이 어느 정도 효과가 있는 것 같으니까 20mg으로 용량을 늘릴게요."
"저 약을 꼭 먹어야 할까요. 피해망상이 아닌 게 확인되기도 했고, 외부적 상황이 많이 좋아져서 괜찮을 것 같은데요, 무엇보다도 약을 먹으면 너무 멍해져서요. 글을 쓸 수가 없어요. 글을 쓰고 싶거든요."
"글을 쓰세요?"
"네, 브런치에 글을 쓰고 있어요."
"아 저도 글을 쓰고 싶었는데, 포기했어요. 저는 아픈 아이를 혼자 키우고 있어서 시간을 좀 더 탄력적으로 쓸 수 있는 작가가 되고 싶었는데요, 그러려면 어느 정도는 현재 직업을 유지하며 노력하는 시간이 필요한데, 저는 나태해서 안되더라고요. 저는 그래서 이렇게 쳇바퀴 굴리는 삶을 그냥 살기로 했어요."
갑자기 가슴에 작은 돌이 던져진 것 같았어요. 제 앞에 흰 가운을 입고 약간은 권태롭게 의사역을 하고 있는 제 또래의 이 여자는 그만의 고통을, 권태를 등에 업고 살아가고 있었네요.
아무래도 다음에 방문하면 제가 그녀의 손을 어루만지고 힘 내시라고 말할 것만 같아졌어요. 그리고 그 순간, 깨달았네요. 나의 내면의 고통에서 벗어나 타인의 고통을 상상할 수 있게 된 것, 이미 제가 충분히 치유가 되었다는 사실을요.
자, 이제 제 얘기가 끝났냐고요?
아니요. 아직 제 상황은 나아진 게 그닥 없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