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타이 Nov 10. 2023

정신병자 vs 정상인

차이는 무엇일까요

한 달간 제 이메일을 훔쳐본 범인은 안 찾기로 했습니다.


그 사람 때문에 스스로를 정신병자라고 의심했고, 정신병 때문에 실직할 수도 있다는 극심한 불안과 우울에 시달렸지만, 그 덕분에 정신과에서 상담도 받아보고, 폭세틴도 먹어보고, 수년만에 처음으로 회사를 떠나 온전한 휴가도 다녀왔습니다.


어쩌면 이 일련의 해프닝에 감사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전문가와 상담하지 않았다면 절대 스스로 찾아낼 수 없었을 심연에 가라앉은 불안의 원인들을 만났습니다.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제대로 들여다볼 틈 없이 분투하며 살아온 저를 만났습니다. 굳건한 줄만 알았는데, 상처받고 나약한 나를 마주했더니 스스로를 보살필 기회도 온전히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네요. 적절한 질문을 던져주는 스마트한 제 또래의 여성 정신과 의사도 마음에 듭니다.


"약을 먹고 나서 멍청해지는 게 싫어요. 평상시의 사고력으로 생각을 정리하고 싶어요."

"폭세틴 복용 후 너무 멍청해진다 싶으면 드시지 마세요. 종종 그런 부작용이 보고되긴 하거든요."


일주일 전만 해도 안전하니 강추한다던 항우울제 복용에 대해 미온적인 입장으로 바뀌었네요. 몇 가지 질문 끝에 저에게 약물치료가 시급하지 않다고 판단했나 봅니다.


이게 고작 열흘 만에 일어난 변화라는 게 믿기시나요? 열흘 전만 해도 저는 피해망상이 의심되는 우울증 환자였는데 말이에요.


인간은 한없이 약해서 언제고 파괴될 수 있고, 그러니 무슨 일이든 혼자 감당할 수 있다고 오만 떨지 않아야겠습니다. 제 모습을 지키며 살아가는 오늘 하루의 매 순간 삶에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저를 구한 작은 우연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지금 생각하니 아찔합니다.



첫 번째로, 저에게는 피해망상 환자를 가족으로 둔 친한 친구가 있습니다.


누군가 제 이메일을 열어보는 것 같다는 의심이 들었을 때, 그 친구의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친한 친구였기 때문에 상세하게 환자의 증상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절반은 다정한 엄마, 절반은 피해망상 환자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괜찮은 날이면 작은 소반이지만 정성을 가득 담아 한 상 차려 친구 앞에 가져다 놓고 이건 괭이 나물, 이건 도라지 하며 살갑게 수저에 올려줍니다. 그렇지 않은 날이면 이웃집에 벽돌을 던지고, 시장 상인의 머리채를 잡고, 칼로 위협합니다. 친구는 매일이 불안합니다. 경찰에서 전화가 오는 날은 미친게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은 날도 항상 현관 문고리를 돌리며 생각합니다. 오늘은 누구일까. 부디 엄마이길.


친구의 엄마는 왜 환자가 되었을까요.


이해 범위를 벗어난 일이 삶에 벌어졌습니다.

어느 날 잘 운영하던 사업체가 망했습니다. 왜일까요? 몸이 부서져라 열심히 일했는데요. 그녀는 이유를 찾아야 합니다. 때마침 평생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았던 남편이 보입니다. 공교롭게도 그가 드나들고부터 사업이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인과관계 속에서 살아간다고 착각합니다. 그녀는 그 이유를 남편에게서 찾았습니다. 명확하지 않은 논리의 공백은 서서히 상상으로 메워집니다. 남편은 필시 외도를 위해 돈을 빼돌렸을 것입니다.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을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수년동안 자신에게 벌어진 일, 그리고 그로 인한 고통을 누구에게도 제대로 털어놓지 못했습니다. 부유하다 갑자기 추락한 자신의 처지를 털어놓을만한 사람이 없었고, 의지하는 사람들은 너무나 멀리 있었습니다. 그래서 혼자서 안으로만 안으로만 침잠해 들어갔습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방치했습니다.


나이가 먹을수록 타인이라는 존재가 점점 나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가 연결되어 있는 건 아닐까요.


우리를 둘러싼 세상은 이해 범위를 벗어난 일 투성이고, 인과가 맞지 않는 일 투성입니다. 노력한다고 다 되는 세상이 아닌데 자꾸 세상은 노력하면 다 된다고 구라를 칩니다. 그러니 누구나 할 수 있는 실패를 경험한 사람이 아니라 루저, 낙오자가 되는 것 같고, 사회에서 분리되는 고통을 겪습니다. 생존은 더 버거운 과제가 됩니다.


내가 못나서 이 놀랍도록 효율적이고 공정한 사회에서 도태되었으니 누구를 붙들고 하소연할 수 있나요. 사람들은 모두 타인의 감정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노력을 기울이기엔 너무나 바빠 보입니다.


친구가 저에게 가족의 증상을 말해주지 않았다면, 저는 누군가 내 이메일을 훔쳐보고 있다는 생각이 피해망상의 증상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을 겁니다. 깨닫지 못했다면 팀원이 "메일은 수신확인이 되어 있는데 답변을 안 주셔서요"라고 말했을 때, 수치심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고, 제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메일시스템 오류 문의 메일을 보내는 일도 없었을 겁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다면 저는 계속 누군가가 내 이메일을 보고 있다는 생각만 강화되었을 것이고, 그게 누구일까 생각하는 데까지 뻗어나갔을 수도 있었을 거예요.


저는 결심했습니다. 누군가 불편한 표정이면 물어보기로요. 누군가 저에게 말하려고 하면 반드시 들어주기로요. 내가 될 수도 있었을 수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친절을 잃지 않기로 했습니다.


저를 미치지 않을 수 있게 해 줬던 수없이 많은 우연에 대해서 더 들어보고 싶으신가요?




* 친구 가족의 직업과 성별, 모든 디테일 등은 모두 변경했습니다. 실제 인물과 동일할 수 없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범인은 누구일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