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는 좋은 인간을 목표로 삼지 못할 것 같아 두렵다
어렵사리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괴물>을 보았다. 상영관도 찾기 어렵지만, 하루에 한 번만 상영하는지라 시간 맞춰 여석을 예매하기가 쉽지 않았다. 동생 내외가 보았다고 다시 환기시켜주지 않았다면 이 좋은 영화를 잊고 놓쳤을 뻔했다고 생각하니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을 알게 해주는 '연결'이 새삼 너무 다행스러웠다.
영화를 본 이후 이 영화를 두고 "아동 성소수자 얽힌 사건 그려"라고 소제목을 단 기사를 보았다. 이들에게 아동 성소수자라고 일컬어도 되는지 잘 모르겠다. 동성 간의 우정(사랑)을 구분 지어 "동성애"라고 이름 지어도 되는 건지도 잘 모르겠다.
특히나 아직 미숙하여 어른들의 지도 감독이 필요하다고 사회통념상 인식되는 아동의 경우, 성인 성소수자보다 더 복잡하고 어려운 것 같다. 동성애 혐오는 나에게도 깊기 때문이다. 세련된 인간이 되고 싶어서 아닌 척하고 있을 뿐이다. 아이들에게 성소수자라 표현하는 게 폭력적이라고 여길 정도다. 그것이 별스러워지지 않는 사회가 올 때까지 유보해주면 좋겠는데, 그것이 표현되지 않는한 별스러워지지 않아질 일은 없다. 자유를 향한 첫발은 늘 고통과 함께 한다.
몇 해전 어느 날 거래처 부장님과 가진 술자리였다. 당시 미혼이었던 거래처의 부장님은 자신의 인생에 대해 이런저런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중 하나는 한 때 동성애자였던 그가 고등학교 때 경험한 동성애에 대한 이야기였다. 학교 인근의 공원에서 당시 파트너였던 선배와 성교를 했다. 한참을 성교 중일 때, 공원을 지나는 아저씨와 눈이 마주쳤단다. "아담이 따로 없었지요. 뭐"라고 말하는 그에게 웃었지만, 혐오감을 느꼈다. 더 이상 그에 대해 알아가기 두려웠다.
영화 속의 아이들은 너른 들판을 뛰어다니고, 자신들만의 공간을 구축하고, 시간을 함께 보내며 그들만의 비밀을 만든다. 사회의 평가와 무관하게 상대의 진정한 이야기를 듣고 깊이 이해하며 자신들의 세계를 지키려는 모습도 보인다. 사랑이 아니라면 천사들이라고 해야 할까.
특별히 시대적 배경에 대해 설명하지 않는 영화에서 나는 이들이 내내 스마트폰을 들여다보지 않는 것이 더 신기해 보였다. 사랑을 그리는 영화에서는 유난히 자연과의 동화를 많이 그려낸다. 사랑할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둘만의 낙원을 발견하기 위해 세상을 향한 모험을 시작하는지도 모르겠다.
나도 사랑을 할 때는 자연을 찾아다녔던 것 같은데, 최근엔 스마트폰에 빠져 산다. 삶의 안전지대에 머무르며 스스로 모험을 벌이지 않는다.
내가 이렇다고해도 남의 사랑과 감정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것은 피하고 싶다. 그들만의 유토피아를 만들고 그 안에서 행복하겠다는데, 그들을 향해 세상의 기준에 맞추라고 폭력을 가할 생각도 없다. 그러나 폭력이 아니라고 여길 땐, 어떻게 해야 할까.
걸스바에는 가지만 아이의 동성애는 바로 잡아야 한다고 믿는 아이의 아빠처럼,
바람피우다 죽은 아빠의 이야기는 숨긴 채, 아빠처럼 살아야 한다고 아이에게 말하는 엄마처럼,
진실은 중요한 게 아니라고 말하는 교장선생님처럼,
고등학교 때 같은 반 여자아이에게 프리지아꽃을 자주 사주었지만, 동성애 경험에 대해 말하는 거래처 부장의 엄마였다면 사회적 혐오 대신 남들 다하는 이성애에 빠지라고 했을 나 자신이다.
영화 속 인물들은 모두 각자의 사정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인의 사정에 대해선 무지하다는 것을 쉽게 잊고 쉽게 판단한다.
이슬아의 <부지런한 사랑>는 좋은 글을 연습할 때 게으르지 않게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 아이를 좋아한다" 대신 “그 애는 나를 그냥 스쳐 지나갔다. 지난 한 달 동안 나는 그 애에 관한 온갖 상상에 빠져 단물에 절어 있었는데 이제는 마치 티백처럼 손쉽게 건져진 뒤 물기를 쫙 빼서 곶감처럼 말려진 느낌이었다."라는 문장을 소개한다. "아동 성소수자"라고 일컬었을 때, 마음도 바스러지는 기분이었다.
가치 판단을 담아 말할 때, 이것은 쉽게 폭력이 된다. 사랑이 게을러서는 안 되는 이유다. 쉽게 판단하지 말고, 많이 듣고 많이 생각해야 한다. 내 존재의 근간을 흔들 각오를 하고 사랑하는 이를 지지해야 한다.
영화 속 교장선생님은 말한다. "몇 사람만 누릴 수 있는 건 행복이라고 부르지 않는단다.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걸 행복이라고 한단다". 아이들에게 "행복"의 정의 따위는 없다. 그들은 누구나 누리는 행복이 아니라도 충분히 행복을 가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슬아 글방의 어린이가 썼다. “그리고 인생 살면서 밤은 새워봐야 해. 왜냐하면 놀 시간이 많아져서 좋아. 내가 말한 것을 하면 인생이 행복해질 거야. 행복이란 네가 원하는 것을 하는 거야. 그럼 안녕."
나는 자신의 행복에 대해 알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