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함 속에서 기꺼이 아름다운 것을 길어 올리는 사람들에게
한가람 씨에게.
요즘 작가님이 집필한 새 드라마 <나의 해리에게>에 푹 빠져 있습니다.
드라마 시청자는 꽤 귀엽습니다. 정확히는 본방을 사수하는 시청자 말이에요. 시간을 맞춰 모든 일을 무르고, 티브이 앞에 앉습니다. 애가 타는 마음을 누르며 광고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행여 초반 몇 분이라도 놓칠세라 귀는 쫑긋 세우고 종종거리며 맥주와 간식거리도 꺼내 놓습니다. 드디어 시작, 당신 마음대로 하세요. 기꺼이 마음을 빼앗깁니다.
처음엔 극의 주인공인 신혜선이 연기한 주은호의 해리증상이 흥미로워서 눈길을 끌었는데요, 지금은 우리가 사는 불합리한 현실, 인물들에 닥쳐오는 고난과 불행에 마음이 가닿습니다. 당신은 그조차 사랑스럽게 그립니다. 아마도 세상 모든 것을 아름답게 보는 필터같은 것을 쓰고 있나봅니다.
선망되는 직업을 가진 아나운서들이지만 삶엔 고통이 가득합니다. 아이를 버린 엄마들, 도박에 빠진 아빠들, 사고로 고아가 된 아이들, 아이들에게 어른의 빚을 책임지라는 채권자들, 동생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리는 언니, 후배들에게 자리를 빼앗긴 선배, 직장 내에서 성희롱 당하는 여자, 갑질하는 권력자에게 물벼락을 맞는 남자, 살인 누명을 쓰는 남자...
저는 두세 살이 되었을 때 이미 티브이 속에서 누군가 울면 따라 우는 울음 신동이었습니다. 살림에 바빴던 엄마가 문득문득 바라보면 저는 그렇게 우는 사람만 보면 따라 울었대요. 엄마는 이를 두고 공감능력이라 했지만, 크면서 종종 지나치게 감상적인 것은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감상적이며 굴곡이 많은 삶을 산 사람은 눈물이 헤픕니다. 개그우먼 김숙 씨가 "4천만 땡겨주세요"를 부를 때, 분명 웃기려고 만든 노래에 저는 웁니다. 그녀의 힘든 시절 이야기가 떠올랐거든요. 성공한 동료가 개그맨 동료 후배들을 데리고 거하게 쏘는 자리에 차마 웃으며 어울릴 수 없어, 대신 천 원짜리 몇 장을 꾸어 혼자 소주와 라면을 사 먹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갈비를 먹을 수 있을 때 라면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그녀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이 이야기는 나의 것과 겹쳐집니다. 독립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어요. 여동생과 제가 세 들어사는 집 바로 옆에는 작은 슈퍼마켓이 있었는데, 슈퍼마켓 아줌마가 "아우 이 양반은 바쁠 때마다 없어"하는 그 슈퍼마켓 아저씨는 머리카락을 어깨 넘어까지 치렁치렁 풀고 커다란 오토바이에 물이며 쌀을 실어 배달하는 괴짜였습니다. 집에 오는 길에 보면 근처 할머니 곱창집에서 메뉴판에도 없는 돼지고기 김치찌개를 얻어다 혼자 소주를 드시고 있는 일도 있었지요.
풀리는 일이 없어 우울했던 동생이 슈퍼마켓에 간 날은 아저씨가 혼자 가게를 지키는 날이었어요. 동생은 냉장고에서 소주 한 병, 진열대에서 참치 한 캔을 꺼내 계산대로 향합니다. 삑삑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고 얇고 보드라운 까만 봉지에 그날의 위안이 담깁니다. 동생은 햇빛이 쏟아지는 밖으로 한 걸음을 내딛어요. 그러다 갑자기 쨍그랑. 참치캔 모서리가 어딘가에 닿으며 봉지가 찢어졌고, 그 바람에 소주병이 바닥으로 툭 떨어지며 와장창 깨진 겁니다. 운이 없어도 너무 없는 날입니다. 가뜩이나 의기소침해 있던 동생은 어쩔 줄 몰라하며 당황합니다. 긴 머리 아저씨는 의자에서 일어나 사라집니다. 돌아온 아저씨 손에는 소주 한 병, 참치 한 캔이 들려있습니다. 아저씨는 새 봉지를 동생에게 건넵니다.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요. 저는 제가 함께 하지 못했던 그날, 제 동생이 받은 친절을 영원히 기억할 겁니다.
당신은 불행을 직면한 인간들이 마냥 불행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주은호의 해리 인격인 주혜리는 먹기를 거부하는 환자의 손을 잡고 "살아있는 건 좋은 것"이라 말합니다. 사회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다섯 할머니에게 더부살이를 하는 어린 현오는 자신과 비슷한 환경에 처한 이웃 아이들을 위해 기꺼이 악당과 맞서 협상합니다. 그 밖에도 전과는 있지만 제 여자에겐 순정파인 남자, 돈이 가장 중하지만 어쩐지 아이들을 사랑하게 되어버린 대부업자 같은 조연들까지도요.
그러니까 당신은, 착한 거짓말을 하고 있어요. 아주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그렇듯 하게 그리면서요. 침몰하는 배에서 혼자 살아남은 아이의 이야기를 그린 판타지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와 홀로코스트에서 아이를 살려내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그린 <인생은 아름다워>처럼요. 사람들은 이야기도 좋아하지만, 그럴 듯한 거짓말은 더 좋아합니다. 현실을 잊게 해주니까요.
지옥을 살아도 인간은 사랑과, 희망, 삶의 목적을 찾을 수 있다고 오스트리아의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이 말했습니다. 지옥 같은 현실에서 살아내고 위대한 사상을 남긴 그의 말이니 신뢰할만하지요. 현실의 고난을 어떻게 해석하고, 나의 내면에 새길 것인가. 나는 처한 환경에서 무엇을 더 오래 바라보고, 어떤 이야기를 하며 살 것인가 하는 것들이요. 삶에 목적을 찾는다면 분명 살아가기는 더 수월해지겠지요.
근데 전 <죽음의 수용소>를 읽으며 너무 징그럽다 생각했거든요. 어떻게든 목적을 찾아 살아가는 거 너무 대단한 거 알겠는데요, 사랑하는 이들이 다 잔인하게 죽어버린 지긋지긋한 세상에 남아 사랑과 희망으로 다시 세계를 재건한다? 물론 인류는 이미 그런 역사를 보여주었지요. 하지만 사람은 목적이 없어서 죽기보다는 밥을 못 먹으면 죽고, 잠을 못 자면 죽고 그러지 않나요? 살아남은 자들이 모여 이야기해서 죽은 자들의 서사는 다 그렇게 시체더미처럼 사라지나봅니다.
그러니까 어쩌면 살아남기에 적절한 기술들은 위대하고 아름다운 것인 반면, 시체들이 세상을 떠돌며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은 위험한 것이겠지요. 추한 것들 속에서 기꺼이 아름다움을 길어낸 당신의 재주가, 당신의 눈길이 탐납니다만 저는 지금 사는 세상이 너무 답답합니다.
의미를 찾기가 힘들어요. 대체 사람들이 시달리고 있는 이 고난이 무슨 의미랍니까.
한 달 전 한 모임에서 어떤 목적을 가진 이야기를 쓰고 싶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내내 그 질문이 마음에 남아 한 달 동안 여러 번 곱씹고 또 곱씹었습니다. 제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생각만 했을 뿐. 그 이야기의 목적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것일까요?
고난을 겪으며 그저 살아남은 것은 상처만 남길 뿐입니다. 제가 희망에 가득 찬 이야기를 하는 것은 어딘가 맞지 않네요.
영화 <기생충>을 보고 과거에 겪은 빈곤이 또렷하게 기억나 펑펑 울었습니다. 비오는 밤, 하수구를 역류하는 물이 반지하 방안으로 치밀어 오를 때, 변기보다 낮은 곳에 위치한 사람들 같은 것들이요. 그리고 몇 개월 지나지 않아 댓글 하나를 보았습니다. "지금이 무슨 70년대도 아니고 저렇게 사는 사람이 어디 있냐? 외국인들이 아직도 우리나라에 저런 곳 있다고 믿을까 봐 겁난다"
가슴에 화가 많습니다. 이 세계는 엉망진창인 것 같습니다. 그래도 쓰겠습니다. 진짜 같은 가짜가 아니라, 진짜 제 이야기를 쓰고 싶습니다. 이래놓고도 살아가다보면 가짜 이야기를 더 많이 쓰겠지요?
쓰고 또 쓰다 보면 제 가슴의 한이 뭉툭해지고, 언젠가 비슷한 일을 겪는 누군가를 살릴 다정한 손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