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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tgrim Dec 17. 2019

소통을 위한 미술 수업

- 바바라 크루거 展

우리 모두는 누군가에게 자기의 말과 생각이 전달되기를 바란다. 그것이 소통(communication)의 기본 욕구일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소통의 길목 앞에서 주저한다. 그것은 자신의 말과 생각을 전달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과정에 들어가야 하는 에너지와 결과적으로 전달되지 못한 채 자신에게 남겨진 어떤 상처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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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의 휴관일에 맞추어 특별하게 진행되는 ‘프라빗 투어(Private tour)’의 시작을 기다리는 스무 남짓한 사람들 사이를 15세 어린 청년이 왔다 갔다 걷는다. 사람들에게 시선을 두지 않은 채 조금은 불안하게 계속 걷는다. 왜 그렇게 걷고 있느냐고 묻지도, 앉아있자고도 말하지 않아야 한다. 지금 이 어린 청년은 소통의 길목 앞에서 나름의 에너지를 준비하는 중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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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개념주의 예술가이자 페미니즘 아티스트, 바바라 크루거(Barbara Kruger, 1945~)의 이름이 낯설더라도 그의 대표작인 <나는 쇼핑한다. 고로 존재한다 (I Shop, Therefore I Am)>를 어디에선가 보았을 터. 이 작품은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Cogito, ergo sum)"를 패러디하여 현대 소비사회의 디자인에 대해 큰 질문을 던진 것으로 유명하다.


경제적 관점에서 소비를 이해하지 않고 문화적 ‘기호(sign)’으로서 사물의 목적을 기능에서 이미지로 바꾸는 데 성공한 이 작품은 마르크스가 주창한 ‘사물의 교환가치’와 장 보드리야르의 ‘기호 가치의 소비’ 개념을 잇는 현대 사회의 이미지 미학의 흐름을 보여주고 있다. 좀 더 쉽게 설명하자면, 소비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너무나 쉽게 소비를 실천하며 자신의 ‘사회적 문화적 정체성’을 드러낸다고 생각하지만, 그 이면에는 소비재를 생산하는 생산자들(기업, 시장, 자본 등)의 포획망에 걸려 진정한 소통의 길 위에서 갈 길을 잃기 쉽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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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바라 크루거는 평생을 혼자 살면서도 자본 속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여성으로서의 자신의 목소리를 보여주는 일에 에너지를 사용했던 작가다. “또 다른 예술가, 또 다른 전시회, 또 다른 갤러리, 또 다른 매거진, 또 다른 리뷰, 또 다른 경력, 또 다른 삶 (Another artist, Another exhibition, Another Gallery, Another megazine, Another review, Another career, Another life.)"이라는 문구가 가로지르는 포효하는 맹수의 드러난 이빨 같은 현대인의 삶을 미술관에 작품으로서 걸어 둘 줄 알았던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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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들을 제법 꼼꼼하게 살펴보던 어린 청년에게 어떤 작품이 가장 좋더냐고 물었다.

“저는 그 호랑이 사진, 그게 좋았어요. 이유는 모르겠어요.”

“그랬구나. 그 작품이 너에게 말을 걸어왔구나. 아마 너도 모르게 대화를 시작했을 거야. 그 호랑이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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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가는 차 안에서 계속 말이 없던 어린 청년이 질문을 했다.

“선생님. 그, 바바라 크루거라는 사람 말이에요. 정말 유명한 사람이에요? 저는 잘 모르겠어요. 폰으로 검색해 봤는데, 그렇게 유명한 것 같지는 않아요.”

“음. 분명히 미술계에서 그리고 미국에서는 유명한 사람인 건 맞는 거 같은데. 그런데 유명하다는 게 뭘까, 진짜?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많이 알고 있으면 유명하다고 느껴지지만, 낯설수록 유명하지 않게 느껴지기는 하지.”

“하긴… 저 저번 일요일에 드디어 그 열대어들을 샀거든요. 저한테는 너무 유명한 물고기 같은 건데 사람들은 잘 몰라요. 다들 유명하지 않다고 생각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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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둑어둑해진 귀갓길 내내 어린 청년은 ‘나에게만 유명한 물고기’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미술관이라는 낯선 광장에서 이어진 길목을 걸으며 그는 바바라 크루거와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와 그렇게 ‘소통’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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