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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하영 Sep 27. 2019

연애의 시작

고군분투의 흔적


연애의 시작





해왕성


이번에도 역시,라고 생각한 건 내가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이 어중간했기 때문이다. 이런 질문을 요상한 타이밍에 하는 건 나의 철직하에 이 관계를 지속할 수 있는가에 대한 판가름을 위한 통과의례였다. 몇 개월 전 나는 사랑을 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그건 해왕성처럼 너무나 먼 것이니 일단 달이라도 가보자는 처절한 마음가짐이었다. 그러니까 적어도 우리 관계가 대화나 스킨십에 의해 추진력을 얻었을 때 최소한 대기권은 뚫길 바라며 말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시덥잖은 관계가 너무나 많았다. 메시지 하나에 헤어지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게 밥을 먹고 양치를 하는 것 마냥 쉬워졌기 때문에 자기방어적으로 이런 질문을 만들어 일종의 테스트를 해온 나날이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그는 시답잖은 대답을 하며 나의 기대를 저버렸다. 그렇다면 더 이상 만날 가치는 없는 것이지. 이렇게 마음을 내려놓아도 누군갈 지속적으로 만날 수 없다니. 나는 내가 상처를 준 어느 누군가에게 저주를 받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어쨌든 연락은 여기까지 하기로 하자. 차라리 혼자 밥을 먹고 옷을 한 벌 더 사는 거야. 이게 현명해. 나는 지혜로우니까.

그로부터 며칠 뒤 나는 어느 한 카페에 앉아있다. 연락을 끊으려고 했던 그 사람과 마지막으로 만나기 위해서다. 그는 멍청한 건지 날 사랑하는 건지 여전히 태연했고 재미있지도 않은 이야기를 꺼내고 바보 같은 미소를 지으며 나의 컨디션을 살폈다. 카페에서 나오기 전 잠시 화장실을 다녀온다던 그의 얼굴에서 볼과 턱 사이에 허옇게 뜬 선크림 자국이 보였다. 옷과 머리도 단정해졌는데. 아아, 나는 왜 그 투박한 점이 사랑스럽게 보인 걸까. 불과 한 시간 전만 해도 당신에게 괜히 못된 말을 던지고 다른 생각을 했는데. 멍청이처럼 내게 걸어오는 당신의 프레임 하나에 내가 얼마나 미워지는지, 나는 내가 사랑받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했던 건 나 자신때문이라는 걸 피부로 느껴버렸다. 벌거벗은 것처럼 부끄러워 그냥 도망치려 했지만 난 그 짧은 순간에 당신과 사랑을 하고 상처를 받을 모든 준비를 해버리고 말았다. 그래 그래, 지속적으로 마음을 충족시키기 위해 모든 걸 껴안고 갈 순 없는 거겠지. 로켓은 우주여행을 위해 발사대를 떠나 많은 분리를 거쳐 최소한의 무게로 목표를 향해 날아간다지. 그러고보면 마음 또한 가벼워야만 오래갈 수 있는 것이구나. 사랑 또한 쉽지 않은 여행이니까.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혼자 온갖 생각을 하다 정신을 차리니 성수동의 작은 선술집에 도착해있었다. 이 남자 아직까지 얼굴이 부웅 떠있다. 그 모습은 내게 예뻐보이려 해서 만들어진 것일테니 예뻐해주는 게 맞겠지? 좋아. 아, 그리고 며칠 전에 한 질문은 취소하기로 하자. 내가 뭐라고. 난 많은 거 필요없는 사사로운 인간이야. 한 순간에 사랑에 빠지는 못난 사람일 뿐이야. 


이 사람과 오래오래 사랑할 수 있는 건 하나님도 모르는 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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